티스토리 뷰


2018년 7월 7일 퍼폼 플레이스에서 진행된 <새로운 생활방식 2018>의 리플렛 책자에 실린 글입니다.

“New way of Life 2018” Performance Statement

2018. 7. 6 / Perform Place, Seoul



*


생산주의 퍼포먼스에 대한 때이른 변론


An early argument for productivism performance

 

First of all, there is a difficult question that What is Russian avant-garde. Before then, there is another long question of whether the beginning and end of Avant-garde can be defined or not. And there is a more complex question that no one can answer how to deal with the historical failure of the avant-garde.

Russian Orthodoxism, the traditional Russian culture, and any mechanism of resistance that flowed from 20th Europe all mixed up to become Russian avant-garde. As a result, The word hybrid connotes the meaning of inevitability consequence. And the failure of Avant-garde overlaps exactly with the hybrid avant-garde. Curious and stunning names such as Tram-track V, Donkey's tail, stand at such an inevitable starting point.

We want to face failure again as a form of the hybrid Avant-garde. The format we chose in 2018 is Action, recreate and repeat the 1920s. Thus, pessimistically speaking, the appropriation of productivism Avant-garde still contributes to the declining of experience and accelerating its pace. Summoning the 1920s life and its idea in 2018 may sound very meaningful, but it is also evident that it just has seen romantic and clearly established as only a typical art form.

We take the form of artistic performance to show the process of production itself. Make the actual stage for a play, set up a performer, and make clothes. It takes a very long time to show the whole process of making clothes from beginning to end, and even, it is not that dramatic but boring. So the clothes have already been made except for only a slight part to finish for the performance. It would awkward to have a performer alone in a large empty space, so we seek an aesthetic occupation of the space. Using Russian avant-garde movies as a reference point, and installing several cameras in space. And we consider how to set up the stage lights dramatically. Finishing space is a productivism Russian music.

This form of performance could be an insult to the past artist. We are obviously 'appropriate' in the art that they had failed. Moreover, our results are obvious as well. They failed because they tried to produce, not art, and we will fail because we turn production to art. It is too evident then we don't need to see the play. Dreams of Vladimir Tatlin couldn't achieve in the 1920s will still remain inaccessible to us as well. (In fact, we didn't even have the will to achieve it) It becomes more dramatic, more artistic, and farther from life constantly, so we just add one count of failures.




일단 러시아 미술의 아방가르드를 어디부터 어디까지로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난제가 있다. 아니, 그 이전에 아방가르드의 시작과 끝이 정의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오랜 의문이 있다. 그리고 실패라는 이름을 딛고 또 그것에 대해 논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 없는 질문이 있다.


러시아 정교와 기존 러시아의 토속 문화, 그리고 유럽에서 흘러 들어온 어떠한 저항의 기제는 모두 섞여 혼종의 형태로써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되었다. 이 혼종이란 현상은 유럽을 제외한 세계의 어디든 필연으로써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아방가르드의 실패라는 이름의 필연은 이 혼종의 아방가르드에도 꼭 맞게 겹쳐진다. 전차 궤도V, 당나귀의 꼬리와 같이 우리를 약간은 아연하게 만드는 호기로운 이름들은 그러한 필연적인 출발점에 서 있다.


우리는 그 혼종의 한 형태로서 다시 실패에 직면하고자 한다. 2018년에 1920년대의 사유를 실천하기, 다시 만들기, 반복하기의 방법으로써 우리가 선택한 형식은 현대 미술의 오랜 형태인 퍼포먼스이다. 따라서 비관적으로 말한다면, 생산주의의 해프닝적 전유는 여전히 경험의 시세 하락에 기여하는 것이며 그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2018년에 1920년대의 삶과 그 사유를 소환하는 것은 굉장히 미술사적 의의가 있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동시에 그것이 낭만적이기에 명백히 전형적인 예술의 형식으로서 아주 쉽게 자리매김 된 것임을 반증하기도 한다.


우리는 생산의 과정 자체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퍼포먼스라는 형태를 취했다. 실제 생산주의 연극 무대를 생산의 무대로 만들고, 퍼포머를 세우고, 정해진 시간동안 옷을 만든다. 옷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굉장히 오래 걸릴 뿐더러 사실 그렇게 극적이지 않고 지루함을 불러낼 뿐이니, 옷은 이미 어느 정도 만들어져 퍼포먼스를 위한 아주 약간의 마감이 남아 있을 뿐이다. 넓은 공간에 퍼포머가 혼자 있으면 분명 휑할 테니, 우리는 공간의 미학적 점유를 꾀한다.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영화들을 참조점으로 삼아, 여러 대의 카메라를 공간 이곳 저곳에 설치하고 그 화면들을 겹친다. 그리고 무대의 조명을 어떻게 극적으로 설치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 공간을 마감하는 것은 아주 웅장한 러시아의 생산주의 음악이다. 마치 MC스퀘어의 음악 같은.


이러한 퍼포먼스의 형태는 과거의 생산주의자들에게 어떤 모욕일 것이다. 우리는 명백하게 그들의 이상이 실패한 것을 우리의 예술로 ‘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의 결과 또한 명백하다. 그들은 예술이 아니라 생산을 하려 했기에 실패했고, 우리는 생산을 예술로 전유하기 때문에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아직 퍼포먼스가 진행되지 않았을지라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1920년대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이루어낼 수 없었던 것들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이루지 못한 채로 남게 될 것이다.(사실 우리는 그걸 이루고 싶은 의지도 없었다) 더 극화되고, 더 예술적이 되고, 더 삶과 멀어지며, 그저 실패의 횟수를 하나 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목적은 생산주의가 아니라 생산주의의 전유에 있다고 꿋꿋이 말한다. 실패라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의 의도를 애써 변론한다. 우리의 의도는 정말로 ‘옷을 만들어 배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예술로 전유된 생산주의라는 혼종을 형식으로 조직하는 것에 더 의의를 둔다. 그리고 혼종 속에 숨겨진 우리도 모르는 가능성이 발하는 지점에 초점을 맞춘다. 공간은 어둡게, 스코어는 더 크게, 마이크를 설치하여 공간의 소음을 조작하기, 생산의 공간과 비슷하도록 허술하게 만들어진 통제된 공간 속에 우리는 퍼포머를 밀어 넣어놓고 무책임하게 옷을 만드는 과정을 전시하기를 종용한다. 관객들에게 아무런 극적 장면이 없는 퍼포먼스 앞에서 일단 기다려 보자고 우긴다. 우리는 그 조직된 혼종적 공간 안에서 실패 자체가 아니라 그 사이의 것들에 더 집중하면서 필연성 사이에서 나타날 우연성을 숨죽여 주목한다. 퍼포먼스의 일시성이라는 구태의 형식 위에서 퍼포머가 행하는 것이 퍼포먼스가 아니고 생산의 행위이기에, 정말로 그가 옷을 만들고 있기에, 발생할 어떤 다른 순간을 기다린다. 섬세한 손가락들이 수를 놓는 것만으로 구성되는 작은 동작들은 퍼포먼스와 생산의 경계를 무수히 넘나든다. 어떤 순간은 명확히 생산의 순간이지만, 바로 그 다음 그것은 또다시 예술의 형식이 된다. 순식간에 휙휙 무한히 뒤바꿈되는 그 과정을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는 채로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다. 이 생산주의 퍼포먼스는 그저 그 순간만을 위해 시작된 것이다.


이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이 끝난 뒤 우리에게는 단지 코트 하나만이 생산의 결과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우리에게는 코트가 하나 생겼다.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꼼꼼한 디자이너가 한땀한땀 만든 아주 좋은 원단을 써 만든 따뜻하고 아주 힙한, 올 겨울을 따뜻하게 날 최고의 코트. 무려 세 겹인. 이리봐도 저리봐도 그 어떤 점도 그 시대 타틀린의 코트와는 그다지 가깝지 않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