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매일매일

팬데믹 시대의 일기

ㅅㄴㅐ 2020. 9. 8. 14:46

날짜를 기록하진 않았다. 요즘은 구글 독스에 종종 빡치면 쓴다. 한 문서에 대고 줄줄 써서 어떤 문단이 어떤 시기에 함께 묶여 있는 지만 가늠할 수 있을 뿐... 

제일 처음은 코로나가 기하급수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2월이라 조금 심각하다.

 

*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SNS 의 피드를 계속해서 새로고침 하는 것도 손가락이 힘들다. 

코로나 19로 취소되는 여러 전시의 안내 메일이나 강의 취소 메일들을 하나의 메일함에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삶을 계획하며 사는 것에 대해 무용함을 느끼고 원래 인간은 단독자로 살아가는 것이었지 하는 생각을 한다. 각자 도생. 삶에 있어 나 자신은 주인공도 아니고 조연도 아니다. 세트장 밖에서 서사를 관찰하는 ‘무대에 잘못들어온 사람’이다.

레지던시를 내년 세션으로 미뤄준다고 해서 그것은 마음에 드는데 앞으로의 일년이 더 예측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으니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잠이 안와서 몇 자 더 적으면

세월호 때 같다. 라는 수식어는 안쓰는 게 /못쓰는 게 맞지만

내가 느끼는 감각들은 정확히 그 때와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어나 있을 숫자가 얼마나 어떻게 늘어났을 지는 궁금하긴 한데 또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이 상황이 통제되지 않으며 그것은 나 개인이 아무것도 개입할 수 있는 일을 아니까 겪는 만성적인 무기력함. 그리고 변하지 않는 진실들을 사실인양 이렇게 포장하고 저렇게 포장해서 다른 말로 백번하는 언론들과 결국은 흑과 백 두 가지로 나뉘어질거면서 백 가지 다른 말을 하는 백 명의 다른 사람들. 소음과 다를 바가 없다. 

입만 의사이고 입만 정치인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또 ‘말’을 말로서 얹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냥 한 번 숨을 깊게 쉬고 잠시 참았다가 다시 내쉬고 싶다. 고요 속에서. 

한 사람은 이럴 때마다 끊임없이 예술의 무용함을 자각하게 되고 그것이 자기를 괴롭게 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는 예술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헛 생각을 한다. 너무 사랑해서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판데믹 시대에 또 헛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뭐 그거는 그거대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음성과 양성이라는 하나의 지표가 증상과 무증상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면 계속되는 전수조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정말로 궁금하다. 답을 알지만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마주보고 밥을 먹을 수 있는것의 중요성

내 자유가 제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영화를 보러가는 행동이 누군가의 욕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마저 허상이었고

감염 예방의 관점도 아니고 외교적 관점도 아니고 온전히 개인과 개인의 관계 사이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나는 4월로 예정되어 있었던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무기한 연기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느꼈던 어떤 무력감에 대해서 자꾸 생각한다. 모든 것이 확정되기 전부터 나는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었다. 

 

제발 지랄노

강남구에 확진자 동선이 인터넷에 떠있길래 보았다. 확진자는 몸이 으슬으슬한 기간동안 어딜 특별히 가거나 하진 않았다. 그는 회사에 갔다가 집에 갔고 집에 갔다가 꽈배기집에 들렀다. 일주일에 두번 꽈배기 집에 갔다. 

회사를 마치고 꽈배기를 사러가는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전염병에 걸려서 누워있는 그를 상상한다. 

사람들은 퇴근길에 꽈배기를 사가는 그가 귀엽다고 댓글을 단다. 으 소름돋아라

 

전화영어 플랫폼을 바꾸어야 하나 고민 중이다. 

국내에서 최대 플랫폼의 전화 영어를 꾸준히 하고 있었는데 

이번 팬데믹의 여파가 전화 영어까지 미친 것이다. 

 

대부분의 선생님은 필리핀에 있고 그곳에 있는 센터로 출퇴근하며 수업을 진행한다. 

그런데 현지 사정 상 출근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모든 선생님을 재택근무로 돌렸다고 한다.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재택근무 전환은 상황을 돌아가지 않도록 만든다. 

 

수업이 준비된 선생님이 적다보니 내가 준비된 시간에 수업을 신청하기가 불가능할 뿐더러

예약을 잡아논 수업도 수업가능한 선생님이 없다는 이유로 취소되기가 일쑤였다. 

취소가 되면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아무 때나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쿠폰을 주는데… 

선생님이 없는데 쿠폰이 있어봤자 대체 뭔 소용이냐 싶어서 센터에 메세지를 남겼다. 

나는 이미 두번의 수업이 취소된 상태였고 쿠폰의 유효기간은 일주일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체 이런 경우가 어디있냐고 유효기간이라도 홀드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쏘아붙였더니

되게 미안하다는 형식적인 답변과 함께 유효기간을 최대로 늘려주었다. 

 

코로나 시대의 밀레니얼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에서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은 피아니스트의 실패 뿐이라는 것. 

실패는 겪어야 할 일이며 다시 이어서 한다고 하면 된다고 말하는 밀레니얼의 쿨함

조성진에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제일 좋았던 게 뭐냐고 물었더니 ‘더이상 콩쿨을 안나간도 된다니 좋네요’라고 말하는… 그리고 그는 그가 하고 싶었던 전세계 음악여행을 떠났다. 너무 쿨하다. 

쉬시킨도 그렇고 마켈라도 그렇고… 정석 미남이랄 것은 없지만 두사람은 확실히 잘생겼다. 그런데 순딩한 잘생김이 아니고 쇄골이나 어깨 부근에 엄청 눈에 띄는 타투가 있을 법하고 인스타에 힙한 사진 크롭해서 올릴 거 같은 그러한 밀레니얼 잘생김.. 내가 직접 만나면 절대 말도 못붙일 초 인싸들… 근데 그래서 좋은 거다… 정감있고 만나자마자 술술 말할 수 있는 설렘없는 사람이면 왜 좋겠어. 

심란함에 뒤척이는 새벽 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뜬 쉬시킨의 리스트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클래식이라니 결국 그것은 불화이며 불안정이며 또 바로 그것은 클래식이 아니라 현대라. 

쉬시킨은 4월 초의 공연을 위해 한국에 와 있었는데 물론 예상 가능하다시피 그의 공연 일정은 코로나 때문에 8월로 밀렸다. 그는 대신 한국에서 여러 유튜브 영상을 찍었다. 그것을 보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한국 음대생들이랑 피아노 대결을 하거나 같이 레슨을 받거나 몰카를 하거나 그런 것들이었는데 그의 젊음이 더욱 빛나 좋았다. 

그는 4월에 입국하였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출국하고… 다시 8월에 입국하는 마음이 어떻게 되려나 아 그런 일이 있었죠. 하지만 이제와서 돌아보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네요. 공연은 지금 바로 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려나. 밀레니얼처럼.

아니 잠깐만 방금 그가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네.. 그래 쉬시킨.. 그래서 한국에 그렇게 자주왔던 거엿구나..

코로나.. 덕분에 나는 그를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공연이 미뤄지지 않았다면 그렇게 다양한 유튜브 영상을 못봤을 것이고.. 그를 사랑할 기회를 놓치고.. 그의 공연은 하는 줄도 몰랐겠지.. 덕분에 나는 실업급여를 조금 떼어 그의 공연 티켓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말로 사랑해요가 뭐더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