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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사슴'이라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신화 속에서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사슴을 떠올리게 한다. 비극 <이피게네이아>의 내용을 상기시키자. 아가멤논은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사고 이 때문에 트로이 원정을 앞두고 바람이 전연 불지 않게되어 출정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이 때 그는 그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의 제물로 바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는 딸을 속여 제물로 바친다. 아르테미스는 산 채로 제물에 바쳐진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를 자신에게 불러들이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슴만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회이든 어떤 시대이든 언제나, 저항하지 못하는 거대한 비극적 운명과 그것에 몸부림 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서사는 창작자에게 무궁한 원천을 주는구나 했다. 란티모스는 이걸 너무 강박적으로 푼다. 감독이 미적지근한 태도를 취할지라도 이 영화에서 그리스비극에 대해 논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이다. 신성한 사슴, 저주, 제물, 희생.. 모든 키워드가 신화의 어떤 명확한 지점들을 가르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이상하다. 그냥 신화를 현대 배경에 불러왔기 때문에 생기는 이질감이라고 하기에는, 영화는 신화의 맥락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신화의 기본정서를 공유하면서 아 그럼 이렇게 되나? 하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긋남 자체가 또하나의 비극이 된다.

어떤 비극을 갖다대도 이 영화는 다 설명이 되긴하는데, 그것은 원래 비극이 전형적이기 때문이다. 신의 진노를 산 아버지를 위해 가족이 한 사람 희생되어야한다 - 딱 이 간단한 비극의 서사로 영화의 줄거리는 설명가능하다. 여기에서 뭐가 뭘 상징하고 뭐가 뭘 의미하고, 뭐가 말이 되고 안되고 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 같다.

신탁을 믿는다, 라는 것은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그 자체로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것이지만(꼭 현대가 아니고 그 당대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자식이 희생해야하고 이 운명에 몸부림치는 서사는 만연하다) 일개 개인은 그 불합리에 저항할 수 없으며 온전히 굴복해야만 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이 신탁을 이해하고 그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시점부터 영화는 미친 듯한 긴장감 속으로 빨려든다. 주인공들이 이를 받아들였을 때 남는 서사는 '아버지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누가 대신 죽을 것이냐'(희생해야하느냐)뿐이다. 이 비극 속에서는 왜 아버지 때문에 우리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며, 저주라는 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라는 말들은 완전히 의미가 사라져버린다. 신화와 비극에서는 그것이 '왜' 그런 지는 더이상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주를 받은 가족이 그 불합리함을 인정하고 순응할때 영화는 완전한 픽션의 길로 쓱 넘어간다. 영화가 그저 현실을 있는그대로 거울처럼 반영함으로써 의미를 가질 때도 있지만, 어떤 영화는 현실을 뛰어넘으며 의의를 가지곤 한다. 그 도약은 현실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킬링디어에서 픽션을 통해 발견되는 것은 정상적인척 하고 있던 가족의 '비정상'이었고, 현실부터 불일치와 어긋남을 암시하던 긴장과 노골적인 비난의 분위기는, 관객이 인지하지 못하는 새 줄줄 새기 시작해서 모든 것이 픽션(이 영화에서는 신화임)로 넘어갔을 때에는 홍수처럼 펑 터져버린다. 정상적이지 않지만, 정상이라는 틀을 쓰고 살아온 가족은 아버지의 죄로 인한 저주로 인해 아주 처절하게 무너진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이 모두 아귀가 맞춰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저주로 인해 어긋나게 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미처 보지 못한 어긋남이 드러났을 뿐이다. 가족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던 거짓말, 작은 악행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할때 모든 것은 빠르게 무너진다.  그 지경이 되면 저 가족이 현실에 얼마나 발딛고 있느냐와 같은 합리적 사고는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어버린다. 영화의 형식적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극임을 증명하듯이 모든 대사를 단어 하나씩 끊어 로봇처럼 말한다. 중요한 순간에 대사는 들리지 않고 찣어지는 사운드가 화면을 침입한다. 아주 오랫동안 암전으로 가득찬 화면이 나온다. 무엇이 갑자기 튀어나올지는 무언가 나오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걸 보는 관객은 무력한 동시에, 그 무력에서 강한 정동을 느끼는 것이다. 관객은 그저 그냥 찣어지는 사운드와 숨막히는 긴장감과 처절함에 압도되는 나약한 개인이 되어 온전히 이입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주인공의 몰락은 관객의 무력과 결을 같이한다.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이 영화에서 원 그대로 작용한다. 자신이 가장 강하며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 줄 자만한 권위자가 저주라는 비합리로 인해서 완전히 몰락하는 과정은 언제나 관객들을 정동 속으로 이끈다. 


*결말 내용 있음
원 비극에서는 아버지를 위해 제물로 바쳐진 딸을 불쌍히 여겨 신이 그 딸을 거두고 그 자리에는 죽은 사슴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아무도 안 죽거나, 죽음을 모호하게 메타포처럼 처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감독님은 그 긴장 가득한 순간 관객에게마저 삐걱대는 어긋남을 선사함으로써 이 비극의 서사를 마무리한다. 어린이의 죽음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다. 그리고 희생과 헌신을 약속한, 이피게네이아 비극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에세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음) 큰 딸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의 죽고 싶지 않음을 어떻게 아버지에게 어필할 것인가에 대한 어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작은 이의 죽음은 그 자체로 쾌락이다. 카타르시스적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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