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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화요일 오후 1시 NY MET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조각은 정말 모두 아름다워

그 형태보다는 사실 대리석 특유의 색깔이 좋다. 음 사실 고대 조각은 되게 촌스러운 색깔이 덧입혀져 있다고 하지만.

그게 벗겨지고 그 오묘한 색깔이 되었다는 것이 뭔가 더 이야기도 있고 좋은거 같아. 

그 색깔들은 비에 씻겨지고 다 바람에 날아가 버려서 이제는 불투명하고 따뜻한 하얀색만이 남았다. 

그 색깔은 또 많은 상념과 상상들을 불러일으키는 색이라.

박물관 특유의 드라마틱한 조명과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의 얼굴도 그 존재감을 부여하는 데 톡톡히 한 몫한다. 


statue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며 그 이상적이고 기괴한 포착은 그 이상함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바로크 그림을 3D로 옮기면 이토록 괴기하지 않을지?



1월 4일 수요일 오늘은 내가 캐나다다. 정말 놀라웁지 않은가


정말 코니윌리스적인 하루였다. 

지금은 브라질식 베일리밀크가 들어간(와 술도 들어가 있어 속이 후끈후끈해지는걸)커피를 눈앞에 두고 향을 맡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지만 오늘은 정말 끔찍하고 즐거웠던 다사다난의 날이었다. 

어느 지점에서 죽었다가 다른 차원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캐나다 쪽의 카지노 거리와 번쩍번쩍한 대관람차, 너무 이상하게 생긴 왁스뮤지엄과 애니멀 카페의 중앙에 있는데 이 괴기한 분위기 또한 내가 오늘 마주했던 거대한 자연 경관과 너무 다르고 이질적인 광경인지라 뭐라 말할 수 없이 생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비가 엄청 많이 오고 있었다. 

먹구름은 도통 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거의 타지 않은 나이아가라 폭포행 버스는 체감 시속 200km를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어쩌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이미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지평선 위 하늘의 구름이 걷히고 밝은 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만화에서 천사가 강림할 때나 쓰이는 구름 사이의 빛과 같은 진부한 연출이었다. 

버스가 도착하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만 가득했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 온 것일까?


잠시 커피의 색을 쳐다봤다. 별안간 구름이 끼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멈췄다. 눈이 오기 시작했다. 

눈은 너무 빨리 내려서 금방 옷에 달라붙었고 낮은 기온 때문에 그대로 옷 위에서 얼어붙었다. 

내 옷은 얼음 보숭이가 되었다. 

털어도 떨어지지 않고 딱 딱 소리가 났다. 

엄청난 바람은 내 허파에 구멍을 뚫었고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아서 미친듯이 웃었다. 

몸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또 생각했다. 진짜 아까 그 버스에서 죽은 것이 아닌가?

우리가 잠시 꿈꾸듯 보았던 아름다운 무지개와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모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 아니었는지.

브랜디가 들은 커피를 마시고 속만 후끈해지면서 공상을 위해 계속해서 짱구를 굴린다. 

엄청 뜨거운 물을 더 마시고 싶다. 속이 홀랑 다 데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겉몸은 얼음 보숭이에 속은 후끈하게 데워진 채로 아름답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지도 모른다. 




1월 5일 엄청 허름한 가게에서 아침먹고 최대한 죽치기


시카고 러쉬티켓을 구하지 못하고 스탠딩을 구했다. 27달러였다.

세상에 뮤지컬을 스탠딩으로 본다니 또 그건 어떤 것인지?

브로드웨이의 아버지 조지코헨씨여 타임스퀘어 앞에 있는 당신 앞에서 절이라도 한번 할까요?

해밀턴을 보고 싶네요. 저녁약속이 두번이나 있기 때문에 시간과 경우의 수는 점점 애매해진다. 




날짜를 안씀


내 지갑은 항상 나에게 되돌아 온다. 놀랍게도 언제나 그러했다. 

빈폴 에나멜 검정 반지갑이고 대학 입학할 때 산 것이다. 

당시에는 많은 여자애들이 비슷한 디자인을 썼다. 

나는 물건을 별로 애지중지 쓰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그 지갑을 처음 봤을 때 느낄 수 있는건 아-오래됐다 이다. 


나는 이 지갑을 꽤 여러번 잃어버렸다. 

과실 스튜드오와 화장실에 놓고 나온 것은 정말 스무 번이 넘을 것이다. 

다른 과 강의실에 놓고 온 적도 많으며 지하철에서 떨어뜨리고 내린 적도 있다. 

그 때마다 지갑은 누군가 주워주고, 어찌어찌 다 나에게 되돌아왔다. 

나는 이걸 여러번 반복한 뒤에 아, 이 지갑에는 역시 뭔가가 있나볻. 나는 이 지갑을 절대 잃어버리지 앟ㄴ겠다

얘는 어떻게든 나에게 되돌아올 운명이구나 따위의 생각을 했다. 

근데 어제는 진짜 이 지갑을 잃어버릴 뻔함 


버팔로에 내려서 나이아가라로 가는 시내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데 거기에는 2달러가 필요했다. 

동전으로 낼 수 있을까 싶어 동전을 세어 보려고 했는데 지갑이 없었다. 

제일 먼저 터미널 화장실에 갔다. 없었다. 

가방을 바닥까지 탈탈 뒤졌다. 없었다. 온길을 다 거꾸로 뒤돌아 봐싿. 아무데도 없었다. 좆됐다.


살짝 패닉이 왔는데 여긴 한국이 아니고 심지어 뉴욕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시골마을이었다.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는 최대한 짱구를 굴려야 그걸 다시 찾을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내가 그걸 놓고 올 만한 데를 두 군데로 압축시켰다. 

하나는 버팔로로 출발하려고 들렀던 뉴욕의 포트 오쏘리티 터미널이고 다른 하나는 버스였다. 

터미널에 전화를 해 보았지만 운영시간이 아니라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버스 내부를 찾는 것이었는데 직원이 드라이버가 없어서 버스안을 못본다고 했다.

드라이버가 언제 오냐고 하니깐 9시는 되어야 온다고 했다. 

나는 너무 슬퍼하며 한 시간 반을 공허하게 멍 때렸다.

직원 근무시간이 끝났던지 직원이 바뀌어서 또 가서 징징댔다. 그랬더니 모야 마스터키로 열 수 있다고 함


내 지갑은 내가 앉았던 좌석 밑 깊숙한 곳에 있었다. 

내 손에 그 물렁한 에나멜의 감촉이 느껴졌을 때 너무 감격한 나머지 뭐라뭐라 영어로 방언처럼 높은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직원이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이었고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다시 지갑은 나에게 또 되돌아옴.



1월 7일 타임스퀘어의 카페베네


오늘의 타임스퀘어는 눈이 정말 많이 와서 족히 10cm는 쌓인 것 같고 우리는 눈보라를 뚫으며 그 복잡한 거리를 미친듯이 걸었다. 

눈보라는 얼굴을 막 때리고 가혹하여 입으로 들어오는 것은 뭔 모래 맛이 났다. 

대상없는 억울함을 어딘가에 호소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도 사진에는 눈보라가 찍히지 않는다. 억울하다.



1월 9일 오후 1:37 모마 5층 벤치에서


케빈과 만나서 사실 내가 전공을 바꾸었는데, painting 에서 art theory 란다~ 하니까

글쎄 넌 잘 그리고 재능있는데 이해가 안가네. 이랬다. 

그리고 뒤에 "이론적으로" 말이지. 하고 덧붙임 개새끼 진짜


근데 나는 정말 너무너무 슬펐다.

매년 쏟아져 나오는 모든 졸업생들이 모두 작가가 될 수 있을 리가 만무하고 다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았는다. 

나는 내가 더 이걸 잘해서 이걸 선택한 거지만 이것도 결국 합리화구나 싶다.


이딴 센티멘탈한 생각하고 이걸 또 꾹꾹 공책에 눌러 쓰는 이유는 방금 Kai Althoff의 작품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녀의 그 사소하고 사적인 작품, 그녀의 흔적과 괴로움들을 보면서 더 슬퍼졌는지도 모름.

그녀의 모든 물건과 잡동사니 들이 그거 자체로 그녀를 대변하고 결국 그녀의 살덩이이다. 



1월 11일 오후 5:19 한국은 12일 오전 7시이다. 


졸라 힘들고 돈만 쓰는 여행을 하는 이유는 사실 남은 일년간의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 

용기를 얻고 기억을 얻는다. 

매순간을 순간으로 인식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지금을 처절하게 계속해서 기억하고 되뇌이자.

이것은 멈춰있는 지점이 아니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This is not a moment This is a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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