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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도시들은 다른 유럽의 도시들과 달리, 모두 한 번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진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카셀 역시 전쟁을 딛고 다시 세워진 도시다. 1955년 카셀의 화가이자 미술학교 교수인 아놀드보데(Arnold Bode)는 카셀의 파괴되었던 박물관 프레데치아눔(Fridericianum)에서 첫 도큐멘타전시를 열었다. 카셀도큐멘타는 그 시작부터 예술을 통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 이후 5년에 한 번씩 세계의 이론가, 학생, 예술가들이 카셀에 모여들었다. 2017년. 올해 카셀도큐멘타는 ‘Learning from Athen 아테네로부터 배우다’ 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지난 도큐멘타로부터 5년. 그동안 유럽은 격변했다. 그리스가 파산했고, 브렉시트를 거쳐 영국은 EU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시리아에서는 내전이 일어났고, 유럽인들은 매일 같이 난민들의 거처에 대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잊을만하면 주요 도시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지금, 이런 유럽에서. 예술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또, 우리는 그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올여름 카셀에 다녀온 네 명의 학생이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유경(이하 이) – 카셀에는 어떤 마음으로 갔었어?

박시내(이하 박) – 나는 조바심 때문이었던 것 같아. 2017년에 ‘그랜드 아트 투어’는 놓치면 안 된다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 갔을 때 완전 다를 것이라는 조바심.

김진주(이하 김) – 나도 강박이었어. 그리고 그냥 핑계 삼아 여행을 가고 싶었고.

권태현(이하 권) – 그 강박이나 초조감 같은 게 한국 사람들한테 특히 강하게 나타난 거 같아. 내 주변 사람들도 다들 유럽으로 나가고, 카셀에서도 한국 사람들을 진짜 많이 만났어.

박 – 스스로 공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국미술계 사람들은 계속해서 외국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어. 근데 그걸 또 너무 쉽게 흡수하고, 쉽게 버리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

김 – 나는 카셀에 ‘세계 미술의 장’을 보러 갔는데 그냥 독일 마을의 페스티벌 느낌이었어.

박 – 그래도 3세계 작가들을 소환한 것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전시라고 생각하는데, 그 소환방식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방식이랑 전혀 달랐어.

김 – 어떻게?

박 – 나는 그렇게 그걸 ‘갖다 놓기’만 할 줄은 몰랐어.

권 – 그 이야기 관련해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몇 개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난민 텐트에 난민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작업 앞에 김수자의 보따리를 떡하니 갖다 놓는 디스플레이.

카셀11
Kimsooja (b. 1957, Daegu, South Korea) Bottari (2005) Traditional Korean bed cover and used clothes Dimensions variable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Athens (EMST), promised gift of the artist Fridericianum, Kassel

그 메인 전시장의 광경이 이번 도큐멘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 김수자의 보따리는 독일의 전시장으로 불려오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여러 결의 의미와 개념들이 흐려져 버려. 난민텐트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보따리는, 지금 서양의 관점에서 필요한 일부의 것만 의도적으로 취사선택된 것뿐이야. 3세계 작가들의 작업이 서양 주류 미술 무대에 불려갈 때, 항상 이런 문제가 발생하곤 하잖아. 아시아 여성이 만들어낸 뭔가 동양적인 소재를 이용한 작품이 유럽 한복판에서 그것도 난민 캠프 작업 앞에서 무엇을 상징하게 될지는 말 안 해도 뻔하지. 심지어 그건 ‘보따리’라고.

박 – 이번 카셀 도큐멘타를 보고 생각났던 전시가 있어. 올해 초에 뉴욕 모마(MoMA)에서 이케아와 난민기구가 협업해서 기획한 전시가 있었어. 난민들의 대안-집을 연구한 결과물이었는데. 거기가 모마, 그러니까 현대 미술관이잖아. 그래서 그 전시 위층에서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내용을 담은 실내 모던 건축사를 조망하는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어. 거기서는 전형적인 서구의 집들과 잘 꾸며진 실내 배경들을 보기 좋게 디스플레이해놨는데, 그게 초라한 난민들의 텐트 몇 개와 아주 대비되면서 시각적으로 정말 충격적이더라.

이 – 그걸 의도했을까?

박 – 그건 아닐 거고, 그냥 한 거겠지. 생각 없이. 그 전시의 벽에도 난민들의 명단이 붙어 있는데, 어디 출신이고 어디서 죽었고 하는 정보들이 나열되어있는 표로 말이야. 그건 예전에 아이웨이웨이(Aiweiwei)가 전에 했던 작업의 열화버전으로 보였어. 그런 주제의 전시를 하면서, 아시아 작가의 작업 방식을 그대로 똑같이 빌려와서 열화하는 방식은 정말 구린 것 같아. 이번 카셀에도 그런 작업이 너무 많았고. 패브릭을 매체로 한 작업이 그토록 많았던 것을 생각해봐. 그 의도가 너무 투명하잖아.

이 – 맞아. 그러한 방법론은 이제는 너무 흔하달까. 패브릭이나 테피스트리 작업들이 특히 이런 국제적인 전시에서 산발적으로 더 나오는 경향이 보여.

권 – 하지만 지금 이런 정세에서 이렇게 큰 미술제를 하는데 긴급한 정치적 주제를 다루지 않는 것이 더 비판받을 문제아닌가? 주제 자체는 시의성 있다고 생각해.

김 – 그래서 우리가 아테네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뭔데?

권 – 일단 아테네가 상징하는 것 자체가 크잖아. 아테네는 고대부터 서양문명의 상징적인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망한 나라가 되어서 또 다른 방식으로 지금 유럽의 상황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어 버린 거지. 그런 다양한 레이어가 겹쳐지면서 뭔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만한 곳이 되었고.

박  –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배웠느냐? 계속 너무 본질적인 문제까지 가게 되는데, 유럽연합의 존재 목적 자체가 유럽의 공생을 위한 것이었잖아. 그 기능이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노동문제 이주문제가 발생하고, 그 때문에 망한 그리스가 유럽의 몰락을 상징하는 소재가 되어버렸을 뿐이야. 독일은 이주문제나 난민문제와 가장 크게 얽혀있는 나라인데, 그 나라가 그 의제를 예술의 주제로 첨예하게 들고 나온다는 것 자체가, 그 의제를 먼저 선점하겠다는 강대국의 의지 표명 아닐까. 카셀도큐멘타 자체가 문화전쟁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권 – 맞아, 이건 결국 현대미술 전체의 문제가 될 거야. 미술에서 어떤 문제를 섬세하게 가지고 오는 것은 필요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논의 자체를 피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해나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아.

김 – 그것이 이번 카셀의 양상을 변호하기엔 좀 작위적이지 않음? 생각해 봐, 시리아는 이야기를 못 하잖아. 발언권이 없으니까. 그들이 국제미술제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

박 – 아테네 카셀을 보기 위해, 결국 평론가들이 다 같이 독일에서 비행기를 대절해서 가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는 건 정말 모순적이고 웃겨. 세계 미술엘리트들의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혜적인 시선과, 그들이 전시에 제 3세계를 호명하는 방식은 그대로 맞물려 있어.

이 – 그래도 다시 도큐멘타로 돌아가서 전시장 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곳은?

김 – 프리데치아눔이 도큐멘타의 주제, ‘아테네로부터 배우다’라는 주제에는 제일 잘 맞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건 정치 사회적인 그 첨예한 문제를 다룬다기보다 아테네 자체를 계속 떠올리게 하는 정도였어.

김 – 노이에 갤러리 같은 경우는 디스플레이가 괜찮았고. 노이에  노이에는 공간이 좋았잖아?

박 – 전시를 보고 공간이 좋았다고 하는 것은 작품이 별로일 때  그냥 하는 얘기래.

권 – 도큐멘타식의 전시는 작품 하나하나보다 전체 조망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하지 않을까. 특히나 이런 대형 전시에서는 컨텍스트가 더 중요하니까.

이 – 나는 나열식으로 디스플레이된 방식 자체에 회의적인데. 대체 어떤 것에 집중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한 작품을 보고 주제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에 대한 큐레이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권 – 이런 식의 기획은 지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막시밀리아노 지오니의 큐레이팅을 상기시키는데. 그때는 아예 컨셉자체를 ‘백과사전’으로 잡았었잖아.

김 – 무책임 하지.

권 – 근데 알다시피 철저히 의도적인 것이었으니까. 제 3세계 미술이랑 서구 주류 미술이랑 같은 위치에서 볼 수 있도록 한 시도이기도 했고.

박 – 과연 거기가 같은 위치일까?

권 – 당연히  아니지. 그렇지만 계속해서 이렇게 큐레이터쉽의 방법론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해. 물론  그것이 언제나 최선에 도달할 수는 없겠지만.

이 – 그래도 이번 카셀은 과거에 퐁피두에서했던<<지구의 마술사>>전하고는 다른 접근법이었어.

권 – 맞아. 지금 이런 식의 기획이 자꾸만 나오는 것 자체가 전시 감독들이 전시와 미술의 역사를 돌아봄과 동시에 거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거야. 세계를 일정기준에서 엮어내는 기획은, 결과론적으로 서구  중심의 미술계에서 제 3세계 미술을 자신들의 논리에 끼워 맞추기 위한 들러리를 만들어 냈을 뿐이었잖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런 흐름이만들어진 거고.

박 – 하지만 아무리 백과사전식이라고 해도, 아담 심직이 선택하는 작가는 그의 내셔널리티와 머타리얼에따라 선택되기 때문에 결과는 의도적일 수밖에 없지.

김 – 그럼 분위기를 좀 바꿔서 재미있었던 작업들 얘기를 해볼까.

이-  프레데치아눔 위층에서 레나 파파스피루(Rena Papaspyrou)라는 작가가 다양한 질감의 타일들을 모아서 전시한 작업이 기억에 남더라. 작업하는 입장에서, 평소에 이미지상에서 어떻게 하면 신선한 느낌이 날까 고민해서인지 더 눈에 확 들어 왔던 것 같아. 돌아다니면서 직접 주운 걸 정사각형 포맷으로 캡쳐해서 모아 놓았더라고. 전부 각각 다른 물질성이 느껴졌는데, 시각적으로 재미있었어.

Rena Papaspyrou(b. 1938, Athens)  Images in Matter (1995) Ink on wood, metal, and ceramic tiles 140 × 320 cm All works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Athens (EMST), donated by the artist in 2014 All works Fridericianum, Kassel
Rena Papaspyrou(b. 1938, Athens)  Images in Matter (1995) Ink on wood, metal, and ceramic tiles 140 × 320 cm All works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Athens (EMST), donated by the artist in 2014 All works Fridericianum, Kassel

권 – 나는 우연히 아티스트 토크를 듣게 되었는데, 굉장히 재미있는 분들이었어. 에니 스프링클 & 베스 스테판(Annie Sprinkle & Beth Stephens)이라는 듀오였는데, ‘에코-섹슈얼’이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작업 하시더라고. 진짜로 지구랑 사랑을 나눠. 어디 산에 올라가서 여기가 지구의 클리토리스라고 하고, 사람들을 이끌고 ‘E-스팟’ 찾기 같은 퍼포먼스도 하면서. 사랑하는 것을 파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지구와 사랑을 나눠야 한대. 에코페미니즘을 재미있는 방식으로 풀어 내는 분들이었어. 에니 스프링클은 성노동자 운동을 하다가 대안적인 포르노를 찍으면서 미술계로 넘어오신 분이야. ‘에코섹슈얼’ 작업도 탈남근적인 섹스에 대한 고민이 에코이즘을 만나서 시작된 거겠지. 또 듀오 두분이 퀴어 부부야. 그들의 결혼식을 작업으로 풀어서 여러 번 치르기도 했어. 이번 카셀에서는 과거 작업의 기록들도 전시하고, 공공미술 형식으로 Free Sidewalk Sex Clinic을 열기도 했더라.

Annie Sprinkle(b. 1954, Philadelphia) & Beth Stephens(b. 1960, West Virginia)’s Artist Talk: From Postporn to Ecosex: An Art, Love, and Activism Journey, Fridericianum, Kassel, 2017.06.19.
Annie Sprinkle(b. 1954, Philadelphia) & Beth Stephens(b. 1960, West Virginia)’s Artist Talk: From Postporn to Ecosex: An Art, Love, and Activism Journey, Fridericianum, Kassel, 2017.06.19.

박 – 나는 카셀에 소환된 3세계 작가들이 가지는 스탠스가 어떤 것이냐에 대해 생각을 해봤어. 개개인의 작업이 현재의 난민문제에 대해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난민이 불쌍하다’, ‘세계는 미쳤다’, ‘정말 큰일 났다’라고 말하는 아주 1차적인 스탠스도 실제로 전시에 많았잖아. 이러한 중구난방식 의제에서 그래도 이상적인 스탠스가 있다면 무엇일지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데, 약간 시니컬하고 웃기게 조롱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어.

이 – 그건 너무 냉소적이지 않나? 그런 작업이 있었어?

박 – 시니컬함은 작업 자체나 연출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전시 자체나 관객과의 소통에서 나오는 거라고 봐. 관객들이 작업을 보고 시니컬해지는? 그것이 카셀의 숙명이라고 생각해. 카셀의 쾨니히 광장에 있었던 오벨리스크 작업이 떠오르네.

OluOguibe (b. 1964) Das Fremdlinge und Flüchtlinge Monument (Monument for strangers and refugees, 2017) Concrete 3 × 3 × 16.3 m Königsplatz, Kassel
OluOguibe (b. 1964) Das Fremdlinge und Flüchtlinge Monument (Monument for strangers and refugees, 2017) Concrete 3 × 3 × 16.3 m Königsplatz, Kassel

그 작업의 작가는 전쟁 난민이었고, 그것은 자기를 받아준 서방 세계에 대한 일종의 감사의 기념비인데. 오벨리스크 네 면에 ‘나는 낯선자였지만 당신들은 나를 받아주었습니다’라는 글을 네 가지 언어로 적어놓은 것이었어. 내가 이걸 보러 갔을 때, 그 이상한 기념비 밑에서 한 거지가 버스킹을하고 있었어. 포크송을 부르는데, 왜 포크송의 가장 전형적인 가사 있잖아. ‘나는 예술가인데, 돈이 없고 집에 가고 싶어요’하는 노래, 그 작업 밑에서 그 슬픈 노래를 듣는 순간이 나는 이번 카셀에서 제일 재미있었어. 그 순간, 그 풍경이야말로 엉망으로 망해버린 세계를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보여주지 않아?

이 – 이번에  ‘도큐멘타로부터 배우다’라고 조롱하는 그룹도 만들어졌잖아.  그것도 결국 내부가아니고 외부에서 발생한 거지만.

권 – 이번 카셀은 안팎에서 모두 비판받지만, 그 비판의 방향과 결은 다르다고 봐. 그럼 조금 더 근본적으로,  너희는 난민이 아닌 서구의 예술가가 난민을 주제로 미술 작업을 하는 것 자체를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해?

박 – 비판할 수 있고 비판할 거야.

이 – 저번 휘트니 미술관 비엔날레에서 있었던, 다나슈츠(Dana Shutz)의 회화를 두고 일어났던 논쟁이 떠오르는데.

Dana Schutz, Open Casket (2016). Oil on canvas. Collection of the artist; courtesy Petzel, New York.
[1] Dana Schutz, Open Casket (2016). Oil on canvas. Collection of the artist; courtesy Petzel, New York.

백인 여성 작가가 에밋 틸 사건을 다루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는 의문이야. 그리고 그 작업은 그 하나의 측면으로 비판되기에는 여러 레이어가 있지 않았나 싶어. 다나 슈츠의 작업은 구상을 연상시키지만 추상적이고, 그 방식에서 나오는 회화적 재현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와의 것과 다른 것이잖아.

권 – 결국 카셀은 서방세계의 축제이고, 이번 주제도 주류 미술계의 윤리적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주제선정이었다는 문제의식에는 동의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계속해서 실패해야 한다는 거야. 아까 이야기했던 <<지구의 마술사>>도 수없이 많이 이야기 되고 또 비판을 받았지만, 그만큼 의미 있는 전시가 되었잖아. 그게 오히려 3세계 미술에 대한 관심과 논의를 증폭시키기도 하였고.

박 –  <<지구의 마술사>>이야기를 좀 더 하면, 그때 그 논의를 모두 조망했던 작가는 바바라 크루거뿐이었다고 생각해. ‘지구의 마술사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 작업말이야.

Barbara Kruger, Qui sont les magiciens de la terre?, 1989, Recto, painting on panel, Centre Pompidou.
[2] Barbara Kruger, Qui sont les magiciens de la terre?, 1989, Recto, painting on panel, Centre Pompidou.

과연 지구의 마술사가 대체 누구인데? 하는 자조적인 질문을 모두에게 던지는 것인데, 그 작업자체가 전시에 대한 조롱이며  그 전시를 가장 메타적으로 잘 읽어낸 것이라고 봐. 하지만 카셀에서는 그런 작업조차 부재했다고.

권 – 내가 이번 카셀에서 조금 더 확장해서 조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렉쳐나 토크 같은 연계 프로그램들이야. 안토니오 네그리같은 학자들의 렉쳐도 있었고. 아테네로부터 ‘배우다’라는 주제 자체가 그런 렉쳐, 토크 등이 모두 연계되어 있는 기획이잖아. 거기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것이 아쉬워.

김 – 나는 그 파르테논 작업이 이번 도큐멘타의 대표작이라는 것이 제일 충격적이야.

Marta Minujín (b. 1941, Buenos Aires) The Parthenon of Books (2017)
 Steel, books, and plastic sheeting
 19.5 × 29.5 × 65.5 m Commissioned by documenta 14, with support from the Ministry of Media and Culture of Argentina Friedrichsplatz, Kassel
[3] Marta Minujín (b. 1941, Buenos Aires) The Parthenon of Books (2017)
 Steel, books, and plastic sheeting
 19.5 × 29.5 × 65.5 m Commissioned by documenta 14, with support from the Ministry of Media and Culture of Argentina Friedrichsplatz, Kassel

아르헨티나에서 금서로 지정되어 있는 책들로 쌓은 파르테논 신전인데, 문제는 작가가 다른 곳에서도 같은 작업을 계속 해왔다는 거지. 지금 프리데치아눔 앞에 세워진 작업은 그냥 주제만 카셀에 맞게 바꾼 거야.

권 – 지금 카셀의 위상이 우리가 미술사에서 봐왔던, 제만 선생님 시절과 다르기도 하지.

이 – 심직 감독이 기자회견에서 이번 전시회 제목 ‘Learning from Athens’에 대해 이런 말을 했네. “배우는 것은 사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잊는 과정’이고, 그게 제일 좋은 시작점이다. 최고의 가르침은 그곳에 아무 가르침이 없다는 것이다.”

김 – 그게 말 그대로 기획의 의도일까? 전시가 뭘 해결할 수 있나? 생각해보면 사실 올해의 카셀행은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했어. 내가 정말  ‘그랜드 아트 투어’만을 위해서 유럽에 갔다면 화났을 것 같아.

박 – 맞아. 난민들은 초엘리트적인 이 전시의 존재 자체도 영원히 모를걸?

이 – 그래서 우리는 카셀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질문이잖아. 약간 속은 느낌(?)도 나고.

박 – (웃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배워왔지.

김 – 카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줬다기보다는 오히려 큰 질문을 세계에 안겨준 거지.

박 – 글로벌리즘에 대한 비판과 그에 파생되는 탈식민주의의 작업들이 서구에서 어떤 방법으로 제작되고 재현되고 또 어떻게 전시되는지는 미술계에서 계속 회자되어야 할 아주 커다란 과제이고, 그 재현은 언제까지나 완전하지 못할 것이기에 계속해서 이야기되겠지.

권 – 나아가서 정치를 다루는 현대미술은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이야기될 거야. 요즘 미술에서 왜 자꾸 랑시에르를 가지고 오겠어. 감각적인 것의 나눔 자체가 정치라고 하면서 미학이랑 정치, 그둘을 애초에 포개어 놓고 보는 통찰이 그런 사유를 계속해나가는 데 큰 시사점을 주니까. 오히려 정치적 미술이라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도 흥미롭고.

김 – 카셀 도큐멘타의 지금 상태는 우리가 그 이상의 것을 바라거나, 그 이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같아. 우리를 무기력하게, 지치게 하는 느낌이야. 나한테 이번 카셀은 그저 지나간 과거의 카셀과 도래할 미래의 카셀사이에 찍힌 점 정도로만 남은듯.

박 –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는 아주 나이브한 진보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거지.

 


[1]이미지출처:https://news.artnet.com/art-world/dana-schutz-painting-emmett-till-whitney-biennial-protest-897929

[2]이미지출처https://zoowithoutanimals.com/2014/08/21/who-are-the-magicians-of-the-earth/

[3]이미지출처:http://www.documenta14.de/en/artists/1063/marta-minujin


* 이 글은 크리틱-칼에 투고한 글입니다.
http://www.critic-al.org/2017/09/06/learning-from-at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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