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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김구 나의 소원 중 일부



보디츠코가 올해 한국 전시를 위해 준비한 작품은 공공 기념비에 프로젝션 되는 작업이 아니었다.  작업은 어두운 미술관 안에 있는 하얀 김구상 위에 투사된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전문대 대학생, 여성 예술인, 성소수자, 현대차 복직자, 다문화 가정 아이, 탈북자, 세월호 부모님....

이 사람들이 김구 상의 포즈처럼 손을 의자 팔걸이에 두고 다리를 살짝 벌린 채, 그들의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건 정말 우리의 지금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어느 먼 허황된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너무 현실에 착 달라붙어 있어서 그들이 말하는 꿈은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그들이 바라는 미래는 너무 유토피아다. 돌아오지 않을 세계이다. 그것이 김구의 상 위에 쏘여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약간 할 말을 잃게 된다. 

한 여성 예술인님은 그런 얘기를 하셨다. 자기가 남성 예술인들과 술자리에 갔을 때 한 분이 그의 지나간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아 그 때 걔를 임신시켜버렸어야 했는데~ 라고 했다고 한다. 예술인님은 정말 자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서로를 존중해주고 남의 입장에서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라는 얘기를 했다. 자기는 그것만으로도 좋은 세상이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아주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바람인데 나는 이것도 이제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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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여성의 근원적 생물학적 차이와 능력의 차이가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차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나치즘적인 개소리를 조곤조곤 하며, 구글의 다양성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 한 구글의 직원은 해고당했다. 구글 내부 포럼에서는 그 글에 대해 솔직하게 어떻게 생각하냐는 익명 폴이 만들어졌고 50프로의 직원들이 그래도 맞는말 아니냐는 개소리를 재생산했다. 해고된 직원은 줄리안 어산지의 위키리스크에 채용을 제안 받았다.

한 남성 비제이가 다른 여성 비제이의 집에 찾아가서 그녀를 죽일거라는 협박 방송이 한밤중 유튜브로 생방송되었다. 그는 직접 밖으로 나가서 카메라를 들고 걸었다. 팔천명이 그 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는 신고당했고 5만원의 범칙금을 냈다. 살해 협박 방송과 무단흡연에 대한 죄는 같은 경중 아래 놓여있다.

버지니아에서는 토마스 제퍼슨 상을 둘러싸고 백인 우월주의 시위가 벌어졌다. KKK단의 유구한 전통인 마스크는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 자신의 혐오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은 이제 멸시를 받지 않는다. 공포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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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존재가 여기 있음을 처절하게 증명해야만 하는 사회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라니 그것을 외치는 것 자체가 너무 아이러니하다. 김구상 위에 투사되는 언어는 무의미하게 흩어져 버린다.

보디츠코가 김구를 선택한 것은, 그가 김구의 연설에서 문화와 아름다움, 기쁨, 생명이 넘치는 나라를 희망했다는 점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김구라는 인물은 작업을 위해 한국을 짧은 시간안에 흡수해야 했던 한 외국인이 선택한 소재라기에는 너무 많은 레이어가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보디츠코가 김구를 쉽게 선택했기에 그 납작한 레이어 위에 한 겹의 레이어가 더 생겼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회의 외부자인 작가가 선택한 단면적인 레이어는 오히려 그의 다른 기념비 프로젝션보다 더 많은 감정들을 내부자들에게 선사하게 된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희망에서 관객들은 더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김구는 집에 있다가 그냥 웬 총을 맞아 죽었고 총을 쏜 인간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장교로 복귀했고 특진한다. 그리고 공소시효를 넘겨, 나중에 정의봉에 두드려맞아 죽을 때까지 잘먹고 잘 살았다.
남과 북의 절단을 끝까지 유일하게 반대했던 김구의 바람은 그의 죽음과 함께 처참하게 허황된 이상향이 되어버렸다. 역사화 과정에서 김구는 억지로 일으켜 세워지고 숭고해진다. 우리는 너무 힘들에서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 뿐이다. 그 과정의 내부자인 한국인이 보기에 보디츠코 작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보단, 더 할말이 없어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한국인이 알고 있는 김구와 외국인이 선택한 김구는 얼마나 다른가
작업이 되게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도 그 어두컴컴한 전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 복잡한 감정 때문이다. 이게 전부 다 정말 망할 꿈일 뿐이라면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초조감

세월호 엄마가 아이의 옷을 들고 영상에 등장하는 순간 자리를 훌훌 털고 전시장을 홀연히 나갈 수 있는 한국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버지니아 사태가 일어났던 그 날 밤 나는 너무 무서워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난 5월 맨체스터 테러 사건의 추모식 때 시민들이 모여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를 부르는 것을 다시 찾아들었다.(되게 놀랍게도 어제, 일요일에 방송된 비긴어게인에도 윤도현과 이소라가 멘체스터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오아시스의 노래는 말한다. 분노를 되돌아보지 마세요. Don't Look Back In Anger. 언젠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노래는 점점 이상한 현실 아래 공허한 외침이 되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항상 눈물을 흘렸는데 예전에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면, 이제는 너무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노래를 다시 들었던 이유는 끝없는 무력 속에서 두려움 속에서 그럼에도 노래가, 예술이 우리를 움직이는 그 아주 작은 찰나의 위로 때문이다. 울고 있지만 결연한 얼굴로 가사를 곱씹으며 똑바로 노래를 부르는 이방인들에게서 나는 아주 조금 힘을 얻는다. 보디츠코의 작업은 어두운 현실의 반영에 지나지 않게 되었지만 끝없는 어둠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꼼지락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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