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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생각

새벽에 잠이 안와서

ㅅㄴㅐ 2015. 5. 12. 03:53

과제로 썼던 글을 보는데 와 나 너무 패기 있게 쓴다. 마치 자 몰라도 우기면 돼! 자신감이 중요한거야! 라고 외치고 있는듯하다.

싹 아카이빙하고 자야지. 다듬지 않고 이불킥 용으로 백업해 두는데 영 아닌부분은 몇군데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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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 많은 담론들과 마주하게 되면 당황스럽고 나 또한 작아진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작업활동을 하게 된다면 이 수많은 담론들 중 하나를 안고 가야 하는 것인지, 이 외의 또 다른 길이 존재하는 것인지, 이것과 맞서야 하는 것인지, 아니 그보다 제일 먼저 저 엄청난 담론들 중 하나가 내 작품에 끼워 맞춰질 수나 있을 것인지, 별 생각이 다 들기도 한다. 예술은 끊임없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이전의 무지함을 보완하고 다져가며 비대해졌다. 아니 예술이 비대해지기 보다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담론들의 파워가 세졌다.
 
사진 기술의 발전으로 본래의 예술 작품에 존재하던 파워, 그러니까 미학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아우라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사진은 원판만 있으면 수 백장, 수 천장 인화가 가능하다. 그렇게나 많은 것이 생긴다면 어느 것이 먼저였느냐는 더 이상 중요할 수가 없다. 발터 벤야민은 이러한 아우라의 붕괴를 긍정적으로 표했다. 그 전의 기존의 예술작품에 존재하던 종교적 제의와 진정한 아름다움의 추구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그런 것 하나 없이 예술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이 제시된 것이라고 벤야민은 평가했던 것 같다.

고흐의 아무것도 아니었던 신발 그림 또한 담론을 만남으로서 힘을 얻게 된다. 농부가 신은 듯한 흙으로 덮여 있는 작은 구두를 그린 작은 그림은 고흐의 다른 그림들이 재조명을 받게 된 이후에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작품이다. 이 그림이 현대에 와서 이런저런 담론의 예시로서 언급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처음 그것을 끌어 들어온 하이데거의 영향이 클 것이다. 그는 고흐의 구두는 단순한 구두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며, 예술작품은 이같이 존재자를 비은폐성으로 이끌어 내어, 관람자가 진정으로 어떠한 존재인지 가능성을 열어주어야 하는 역할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 자체도 아예 없이 진리가 열어준 시공간 속에서 수용자가 스스로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굉장히 꼬아둔 말이지만 그 말의 진의는 작품엔 진리가 있고 그것은 수용자에게 달려있다는 아주 근본적인 의미의 현대미술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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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중 1 권 씨 글 읽고 쓴건데... 뭔가 불만이 있었던 듯하다.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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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 성서를 뒤집었다. 인류의 기원은 성경이 아니라 유인원이라 외쳤다. 쇤베르크는 음악에 꼭 조성이 있어야 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 생각은 처음에 질타에 멸시에 비난을 받는다. 원래 처음이 어렵다. 후에 사람들은 그들을 존중하고 칭송한다. 그들의 생각은 위대해서 세상을 바꾸었다 말한다. 그 위대한 생각의 기원은 어디일까, 그들의 세상을 바꿔놓은 생각들은 어디서 탄생했을지. 이 책은 아이슈타인, 피카소, 루이스캐럴 같은 천재들의 생각 도구들을 나름 분류해서 살펴보는데, 그 과정엔 동의할 수 없었지만 (애초의 생각의 도구라는 게 존재하고 그게 분류가 가능한 것이 맞는가? 천재들의 생각의 도구와 내 생각의 도구가 본받아 같아야할 필요가 있는지. 그들은 모두 훌륭하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들이 훌륭한 이유는 그들이 생각의 도구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 아니고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 그들만의 세계를 개척한 데 있다.) 분명 흥미로운 과정은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생각 도구는 감정이입이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연기를 할 때 그 인물인 척, 그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인물이 된다고 한다. 그의 연기는 소름끼친다. 이번 해에 아카데미 상을 받은 링컨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주인공 링컨 대통령역인데, 영화를 다 보고 실제 링컨 대통령을 떠올렸을 때, 난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얼굴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훌륭한 연기였다. 아니 애초에 연기가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아마 그 당시에 실제 링컨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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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탄생>읽고 쓴 글

교수님이 정해주신 도서가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다. 다데루를 극찬하는 글이다...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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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물론 기우긴 하지만- 예술에 있어서 회화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진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곤 한다. 현대에 있어 예술의 의미는 점점 확장되고 그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은 점점 무한해진다. 다양한 매체들을 그 사용법이 점차 다양해지고 예술로서 받아 들여지는 방법도 다양해지고 그러한 매체들은 매우 쉽게 설득된다.
 
이번에 리움에서 하는 아트스펙트럼 전시는 굉장히 다양한 매체들을 사용하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였다. 영상과 설치, 실제로 뭔가 구현하며 재현하는 것들은 개념이 강하며 그만큼 임팩트가 있다. 그곳에 다양한 매체 작품 사이로 제니조씨의 회화작품들이 비집고 끼어있었다. 그 작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는데 어쩌면 회화로서 가질 수 있는 분위기와 가치는 언제나 영원불멸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사이즈도 별로 크지 않았고 유화로 한번 바른듯한 가벼운 작품이었지만 그 안에서 설명 되어지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작품들보다 직접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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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는 회화의 퇴조를 설명하며 사물성 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예술들이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회화의 얼굴들이 가치는 의의, 사물성에 대해서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며 의미론적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내면의 예술이든 객체성의 예술이든 사물은 여전히 존재하며 회화도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든, 의미가 사라지든 그 물질적인 것들 것 사람을 만족시키는 일면이 있으며 그것은 그 변화무쌍한 얼굴들로만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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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었다는 것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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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를 보았을 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유명한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으로서 원전 이후의 일본의 전후 상황의 참혹함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안에 존재할 수 있는 감성을 충분히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그 때를 떠올리게 하고 공감하게 하는 토대를 구축한다. 이 영화가 거장의 작품이라는 이름 아래, 일본의 호평은 물론 세계의 찬사까지 받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런 말 못할 기분에 휩싸였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전 이후에 수많은 목숨을 잃고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미국도 예견하지 못한 결과였으며 누구도 책임지지 못하는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 근원엔 다가가지조차 않으면서 결과에만 집착하여 동정론을 이끌어 내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것이 신뢰를 얻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이 해결하지 않고 내버려 둔 사람들은 어떤 분노를 가지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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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야자키를 싫어한다ㅗㅗ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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