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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ㅐ 2015. 9. 5. 12:00

김수영의 전통 인식은 그가 스스로 밝혔듯

"요즘의 정치풍조나 저널리즘에서 강조하는 민족주의"

와 분명 다른 맥락을 지닌다. 김수영에게 당대 민족주의 담론은 민족적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감정적 구호이거나

"미국과 소련의 세력에 대한 대칭어"

에 지나지 않았다.

 

논자들이 김수영의 전통 인식을

"한국의 지성사에서 매우 독보적"

인 사유라고 논평할 수 있었던 것도 김수영이 민족주의 이념에 근거하여 전통을 강조하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거대한 뿌리"의 첫 연에 서술된 에피소드는 민족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였다.

 

김수영이 보기에는, 한일회담 이후 다시 고개를 든 저항적 민족주의란 해방기의 자주독립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재소환했음에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민족의식만 격상시킨 쇼비니즘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었다. 이

"투박한 민족주의"

는 김수영에게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여겨졌으며, 그는 오히려 제국주의자의 시선에 따라 발견된 19세기 조선에서 불현듯 전통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된다.

 

이자벨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비숍은 19세기말의 한국사회를 전근대적이고 미개한 동양의 전형으로 묘사하였다.

"거대한 뿌리"

에서 김수영이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

고 표현한 것 역시 비숍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충분히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시를 쓸 당시 광화문에는 5 16을 기념해 37개의 호국영웅의 석고상이 진열되어 있어 한바탕 논란이 되었다. 이 선열상은

"민족정신의 양양"

이라는 슬로건 아래 미대 조각과 대학생들이 벼락치기로 동원되어 만들어낸 것으로

"대로 한복판에 역사 인물들이 촌스럽게"

배치된, 곧잘 쓰러지던 흉물스런 풍경이었다. 김수영은 정부가 주도하는

"민족중흥"

의 거리에 서서 민족을 지켰던 영웅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에 희생당하고 배반당한 개인의 수난과 고통을 기꺼이 전통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처럼

"공식적인 기억"

의 연대기에 내포된 모순과 착오를 폭로하거나 교정하는 방식을 통해 전통을 새롭게 재인식하고자 했다. 김수영에게는 민족의 식민지성과 전근대성이 전통이고,

"요강, 망건, 장죽, 곰보"

등이 그 유력한 표상이 된다.

 

좌우의 민족주의 이념이 극명하게 대립했던 해방기를 비교적 리버럴한 순간으로 기억하던 김수영에게 민족주의가 다시 도래한 시기가

"1960년대"

였다. 이 시기 김수영은 현실에서 완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지배 / 대항 민족주의의 이념을 일순간 시시하고 무기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수한 반동"

을 전통의 의미론으로 삼았다. 김수영은 민족적 전통에서 망각된

"요강, 망건, 장죽, 곰보"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역사적 이미지를 재등장시켰다.

 

김수영에게 역사는 필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우연적인 사건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층적인 역사적 순간은 현재와 교차하며 현실의 문제를 극복할 하나의 방편이 된다. 이것이

"온몸의 시학"

에서

"동시에"

"무엇을"

보다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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