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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를 읽으면서

ㅅㄴㅐ 2015. 10. 20. 22:34

 

 

귄터그라스 - 넙치를 읽으면서

 

역사는 승자에 의해 서술된다. 역사는 강자에 의해 서술된다. 역사는 남자에 의해 서술되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지하며, 항상 균형점을 찾아 공존하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서술된 역사가 얼마나 남성주의적으로 쓰여졌는지 인지하지도조차 못한다는 데서 발생 한다.

 

넙치는 여성이 없었다면 인류는 오래 전에 멸망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류를 굶주림에서 구해낸 것은 여성 요리사들이었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음식을 통해 세계에 커다란 기여를 한 여성들이 있었고 이들은 인류를 파멸의 운명으로부터 되살렸다. 민족 대 이동 시절에 순무를 주식으로 선택한 것도 여성들이었고 7년 전쟁 시절, 겨우 기저 따위를 먹으며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던 인류를 구해낸 것 또한 여성들이 선택한 감자였다. 그러면서 넙치는, 인구 절반이 영양실조로 죽는 현대에서도 여성의 슬기와 지혜만 있다면 인류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비약한다. 사실 넙치의 언변과 궤변사이의 논리는 우리가 이 불균형적인 권력구조에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잠식되어 있었는지 확인 시켜주기도 한다. 아니 근데 또, 이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고 하는 남성 화자 또한 남자들이 자신들한테 먹을 것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여자들을 단지 '요리사'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읽다보면 난독증이 오기 시작한다. 여자를 요리사라 칭하는 남성 화자는 4000년을 살았다고 하고 그래서 이름도 여러개이다. 4000년을 살면서 다양한 여성 요리사들을 만났고 넙치를 만났다. 넙치는 항상 남성의 편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을 아는 넙치는 남성들이 자신에게 조언을 구할 때마다 그들에게만 유리하도록 술수를 썼고 결국 넙치는 여성들에게 잡혀, 불균형한 권력구조에 기여함과 남자들의 죄를 부추긴 혐의로 여인법정에 서게 된다. 그 때부터 넙치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온갖 궤변과 감언이설, 협박과 회유를 선보인다. 이 텍스트의 양은 어마어마하고, 어마어마하게 화려하며 장황하다. 아 4000년 묵은 달변가임이 분명하다. 여인법정은 넙치의 달변(이꼬르 궤변)에 휘둘리기도 하고 되받아치기도 하고 넙치를 공감하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싸우기도 한다. 넙치를 죽이려는 사람들과 그래도 넙치의 편을 들어주는 자들과 모든 것을 부정하는 과격한 페미니스트들.. 여인법정은 개판이다.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마를 짚게 된다.

그래도 넙치마저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그 기이한 권력구조 형성에 분명히 이바지했다는 점이고 그건 이미 되돌릴 수 없던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그러면서 절규한다. 남성들이여 나는 너희를 구원하고 싶었던 것이지, 파멸의 길을 자초하라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역사를 통해 만나는 신화와 동화는 신비롭고 역겹고 어이가 없다. 모순덩어리 넙치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는 논리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귀를 귀울이게 되는 묘한 구석이 있다. 아주 싸가지도 없다. 불균형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남성들과 달리 그 모두를 알고 인지하고 체감하면서도 여성들을 훈계하고 비난할 때는 얼이 빠지기도 한다. 여성들이여, 너희는 남성들이 폭력의 길과 파멸의 길로 스스로 들어설 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라는 자칭 이상주의자 제 3자의 헛소리. 아오 개새끼 진짜.

 

 

 

 

 

 

우리의 문학 작품에는 희극적인 성격의 여자 주인공이 부족합니다. 돈키호테나 트리스트럼 샌디, 팔스타프, 오스카 마레라트 등등, 절망적인 상황을 희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모두 남자 주인공들입니다. 반면에 여자들은 끝없는 비극의 나락에 빠지고 맙니다. 마리아 슈투아르트나 엘렉트라, 아그네스 베르나우어, 혹은 노라 등은 모두 비극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량하게 한숨만 쉬거나, 광기에 사로잡혀 늪 속으로 들어가거나, 죄책감에 괴로워하거나, 아니면 남자들의 눈먼 권력욕 속에서 파멸합니다. 맥베스 부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머하고는 완전히 담을 쌓은 채 여인들은 고통의 하녀가 되어 있습니다. 성녀든, 창녀든, 마녀든, 아니면 이 세 가지 속성을 다 지닌 여자이든 말입니다. 혹은 그들은 고통으로 동처럼 굳어 있습니다. 냉담하게 굳어서, 쓰라림을 겪으며 말없이 한탄만 하고 있습니다. 때로 그들은 오필리아처럼 머리가 돌아 앞뒤가 맞지 않는 시구나 중얼거릴 뿐입니다. 육체적 쾌락과는 거리가 먼 우스꽝스러운 노파나 어리벙벙한 하녀만이 흔히 질겨빠진 유머라고 하는 여성적인 유머의 본보기로 인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늙고 우스꽝스럽건, 아니면 젊고 어리벙벙하건, 여성의 위트는 언제나 조연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여주인공을 필요로 합니다, 정말로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극에서 코믹한 분위기를 살리는 역할이 왜 찰리 채플린이라든가 디크와 두프 같은 남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겁니까! 친애하는 여성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마침내 위대한 여성 코미디를 무대에 올리라고 요구하는 바입니다. 여성의 코미디가 승리하도록 만듭시다. 슬픈 표정의 기사에게 여자의 스커트를 입혀, 그로 하여금 남성적 편견의 풍차를 향해 돌진하게 합시다. 나는 여러분에게 요리하는 수녀 마르가레테 루쉬, 즉 뚱보 그레트를 제안합니다. 떠나갈 듯한 그녀의 웃음소리는 여자들에게 활동공간과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바로 그 자유 속에서 유머가, 마침내 여성의 유머가 남성들의 유머와 마찬가지로 폭죽을 터트리며 음탕한 말을 마음껏 지껄일 수 있는 것 입니다! 


피고 넙치, 당신은 지금 여기서 전 세계의 억압받는 여성들을 노리개로 삼아 문학적인 농담을 늘어놓고 있는데, 양심에 걸리지 않습니까? 그래, 맞아요, 우리들은 이른바 창조의 주인님들께서 남녀 평등을 쟁취하려는 우리의 투쟁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는 아주 진지한 문제입니다. 피가 끓듯 감정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그렇다는 거입니다. 우리는 엘렉트라나 노라가 유감스럽게도 단순히 비극적인 인물로 평가절하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돈키호테 같은 여자가 부족한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여자 파우스트 박사나 번쩍거리는 야회복을 입은 여자 메피스토를 팔아먹으려고 들 겁니다. 우리의 원래 주제로 돌아갑시다!


넙치, 그레트에 대한 사안 심리 중, 1권 p. 394




만약에 여자가 뮤즈를 직업으로 가질 수 있다면, 그런 직업을 가진 남자들도 있나요? 만약에 그렇다면, 어떤 남자들이 뮤즈의 역할을 했나요, 다시 말해 어떤 남자들이 유명한 여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어 간접적으로 예술의 진흥에 이바지했나요? 혹시 피고 넙치는, 예술에서 여자의 역할은 기껏해야 거름이나 주고 봉사하는 수동적인 매개 역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우리 여자들은 오로지 남자들의 다 타버린 영혼의 난로에 불을 지피기 위해 존재하는 건가요? 뮤즈로 활동하는 여자들은 시간제 임금을 지불받고 있나요? 넙치, 당신은 선심이나 쓰듯이 우리를 임금 협상 자격이 있는 가내 노동자로 등급을 매기고 우리에게 뮤즈 노동조합을 설립하라고 권하고 싶은 건가요? 대답해 주세요. 적적한 보수만 줄 수 있다면, 여자도 남자 뮤즈를 쓸 수 있나요? 혹시 피고 넙치는 미리 주문한 전문가들의 수다스런 의견을 내세워 지신의 진의를 감추려는 것은 아닌가요? 당신의 속생각은 이런 것 아닐까요? 간혹 능력 있는 여자애들은 피아노를 멋지게 치기도 하고, 도예가로서 공예 분야에 대단한 열성을 쏟기도 하고, 실내 장식가로 인테리어 분야에서 상당한 재능을 보이기도 하고, 또한 사랑에 빠져 고통을 겪거나 오필리아처럼 미쳐버리게 되면, 간혹 어렵지 않게 심장의 붉은 피나 질 분비물, 또는 시커먼 쓸개즙으로 감동적이고 흡입력 있는 멜랑꼴리한 시를 쓰기도 한다, 그렇지만 헨델의 메시아나 칸트의 정언적 명령, 휴트라스부르크의 대사원, 괴테의 파우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피카소의 게르니카 같은 예술의 최고봉은 여자들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바로 그거죠, 피고 넙치?


넙치, 아그네스 쿠르비엘라에 대한 사안 심리 중, 1권 p.160

 

 

 

그러나 엄정하면서도 자비로운 숙녀 여러분! 럼포드와 아만다의 세계 급식 프로그램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방법이라는 나의 주장을 지지하는 분들이 여러분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물론 나는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서없이 서둘러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선 과거와 현재의 기초 식량을 철저하고도 전문적으로 조사할 연구진을 조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의문들이 제기될 것입니다.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에 들풀로 만든 죽이 지녔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우리는 단백질 부족과 그와 관련하여 콩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이쓴가? 또는, 감자가 도입되기 전에 있었던 유럽의 기장 부족 사태는 모택동 시대의 출현 전에 있었던 중국의 쌀부족 현상과 비교될 수 있는가? 그러나 만약 여러분들이 중국의 식향 정책을 곧바로 중부 유럽이라는 토대 위에서 실행해 보려 한다면, 부디 여러분들은 망설일 것 없이 그 이론을 실천에 옮기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그곳이, 느린 속도로,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면서, 단계적으로 지체시키는, 말하자면 느린 그림 동작으로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요? 나의 일제빌이 물었다. 여자들이 거기에 속아 넘어가던 가요? 여자들이 다시 앞치마를 찾고 있다는 말인가요? 맙소사! 그 여자들은 요리 국자로 자신이 해방될 수 있다고 믿나 보죠?

 

넙치, 아만다 보이케에 대한 사안 심리 중, 2권 p.86

 

 

여자들은 사후의 삶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의 화신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남자들은 자신들의 삶 밖에서 영생을 추구해야 합니다. 즉 집을 짓거나, 나무를 심거나, 업적을 남기거나, 영광스럽게 전사함으로써, 혹은 이 모든 것에 앞서 아이를 수태시킴으로써 말입니다. 직접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인간은 잘해야 추정상의 아버지에 불과할 뿐이며 그 때문에 자연 앞에 서면 보잘것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넙치는 이밖에 한층 더 불쾌한 이야기 -넙치는 여자들을 향해 남녀평등이 확대되면 그만큼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점점 더 대머리가 될 거라고 예언했다-를 마치고 나서 모래 바닥 위로 떠올라 지느러미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 한편 여성 배심 법정의 배석 판사들은 양성에 대한 넙치의 구별을 지나치게 생물학적이며 지극히 보수적이라고 비난했다.

 

넙치, 혁명가 로트촐에 대한 사안 심리중, 2권 p. 200

 

 

나는 너희에게 지식과 권력을 주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원한 것은 전쟁과 고작 비참함뿐이었다. 자연을 너희에게 내맡겼으나, 너희들은 기껏 자연을 강탈하고 오염시키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고, 파괴해 버렸다. 내가 너희에게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세계를 풍족하게 먹여 살리지 못하고 있다. 굶주림은 증가하고 있다. 너희의 시대는 단말마를 지르며 끝나 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너희 남자들은 끝장난 것이다. 허튼 수작만 계속해서 벌이고 있으니 이젠 당해낼 재간이 없구나. 자본주의 사회이든 아니면 공산주의 사회이든, 도처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이성의 탈을 쓴 광기 뿐이다. 내가 원한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너희에게 아무리 충고를 해주어 봤자 헛수고다. 남자들의 일은 이걸로 결말이 난 셈이구나. 이제 손을 뗄 시간이 되었다. 내 아들아. 지금이야 말로 물러날 때이다. 품위있게 물러나거라! 

너희는 알렉산더와 케사르, 호엔슈타우펜 가와 독일 기사단, 그리고 나폴레옹과 빌헬름 2세에 대해서는 내게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그럴수 없어. 그들에 대해서는 나는 책임이 없어.그들이 저지른 죄는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래 나의 역사는 끝난게지.

 

넙치, 레나 슈투베 사건의 심리 끝난 뒤 남자에게, 2권 p.299

 

 

 

어때요 빙글빙글 재밌죠? 읽어보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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