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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오해하는 롤리타 서문

ㅅㄴㅐ 2015. 11. 9. 21:41

 

 

 

 

For the benefit of old-fashioned readers who wish to follow the destinies of the real people beyond the true story, a few details may be given, as received from Mr. Windmuller of Ramsdale, who desires his identity suppressed, so that the long shadow of this sorry and sordid business should not reach the community to which he is proud to belong. His daughter, Louise, is by now a college sophomore. Mona Dahl is a student in Paris. Rita has recently married the proprietor of a hotel in Florida. Mrs. Richard F. Schiller died in childbed giving birth to a stillborn girl on Christmas day in 1952 in Graystar, a settlement in the remotest Northwest. Vivian Darkbloom has written a biography, My Cue, to be published shortly, and critics who have perused the manuscript call it her best book. The caretakers of the various cemeteries involved report that no ghosts walk.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운명에 보다 눈길을 주는 옛날 방식의 독자를 위해, Ramsdale의 Mr.Windmuller 가 건네준 몇 가지 자세한 사항을 알려 드립니다. Mr. Windmuller는 자신이 속한 자랑스런 공동체에 이런 누 추한 사실이 알려지길 원치 않으므로, 그의 정체를 감 춰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딸, 루이스는 이제 대학 2학년생입니다. Mona Dahl은 파리의 학생입니다. Rita는 플로리다에 있는 호텔 경영자와 얼마전에 결혼했습니다. Mrs. Richard F. Shiller는 1952년 크리스마스날, 북쪽 변방의 Graystar란 곳에서 여자아이를 사산하는 와중에 돌아가셨습니다. Vivian Darkbloom은 My Cue라는 제목의 일대기를 써서 바로 출판하였고, 이로 인해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여러 묘지 관리인들은 어떤 유령도 전혀 얼씬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This commentator may be excused for repeating what he has stressed in his own books and lectures, namely that 'offensive' is frequently a synonym for 'unusual,' and a great work of art is, of course, always original and thus by its very nature should come as a more or less shocking surprise. I have no intention to glorify HH. No doubt he is horrible. He is abject. He is a shining example of moral leprosy, a mixture of ferocity and jocularity that betrays supreme misery, perhaps, but is not conducive to attractiveness. He is ponderously capricious. Many of his casual opinions on the people and scenery of this country are ludicrous. A desperate honesty that throbs through his confession does not absolve him from sins of diabolical cunning. He is abnormal. He is not a gentleman. But how magically his singing violin can conjure up a tendresse, a compassion for Lolita that makes us entranced with the book while abhorring its author.

 

 

저자가 그의 강연과 저서에서 여러 차례 반복하여 강조하였듯이 '모욕거리 또는 불쾌함'은 평범함을 벗어나는 비범함과 동의어일 수 있고, 따라서 모름지기 위대한 예술은 특유의 독창성으로 인해 감상하는 이들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가했습니다. 나는 H.H(험버트)를 칭송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끔찍한 인물입니다. 그의 죄질은 매우 나쁩니다. 그 어떤 최악의 경지에 있는 고통도 그가 지닌 본래의 잔혹함과 겉으로 행한 익살의 죄값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악취나는 도덕적 타락의 한 사례입니다. 그의 진면목 앞에서 우리가 참다운 매력을 느끼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는 심각하게 변덕스런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가 이 나라의 풍경들과 사람들에 대해 내보이는 의견은 대부분 터무니없습니다. 그는 심장이 고동치듯이 절절한 고백을 풀어놓는 와중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간교하고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도저히 제정신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결단코 신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의 바이올린 연주는 마법처럼 우리로하여금 이 글을 쓴 자를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롤리타에 대한 부드러운 마음과 연민을 들게 하여 이 책을 읽도록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까요.   

 

 

Viewed simply as a novel, Lolita deals with situations and emotions that would remain exasperatingly vague to the reader, had their expression been etiolated by means of platitudinous evasions. True: not a single obscene term is to be found in the whole work. Indeed, the robust Philistine who is conditioned by modern conventions into accepting without qualms a lavish array of four-letter words in a banal novel will be quite shocked by their absence here. If, however, for this paradoxical prude's comfort, an editor attempted to dilute or omit scenes that a certain type of mind might call aphrodisiac [And then he makes reference to the court case in which Ulysses was ruled not to be obscene in 1933], one would have to forego the publication of Lolita altogether, since those very scenes that one might ineptly accuse of sensuous existence of their own are the most strictly functional ones in the development of a tragic tale tending unswervingly to nothing less than a moral apotheosis. The cynic may say that commercial pornography makes the same claim. The learned may counter by asserting that HH's impassioned confession is a tempest in a test tube, that at least 12% of American adult males (a conservative estimate according to Dr. Blanche Schwarzmann, verbal communication) enjoy yearly in one way or another the special experience of HH that HH describes as such despair, that, had our demented diarist gone in the fateful summer of 1947 to a competent psychopathologist, there would have been no disaster, but then, neither would there have been this book.

 

 

 

(롤리타를) 단순히 한 편의 소설로 볼 때에, 이 작품이 만약 쓸데없이 상황을 회피하는 표현 방식으로 이루어졌더라면, 사건 상황과 정서적 측면이 읽는 이들에게 매우 모호하게 전해졌을 것이고 따라서 읽는 이들은 매우 답답해 했을 것입이다. 사실, 이 작품 전체에선 음란하거나 외설적인 단어가 하나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은 네 글자로 된 과격한 욕설이 자주 등장하는 따분하고 시시한 소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관습에 길들여진 우리의 혈기왕성한 속물들, 즉 일부 교양이 부족한 독자들에게 적잖이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출판을 위해서라면 편집자는 속물들의 모순적인 고상함을 지키기 위해, 소위 성적 흥분을 일으킨다고 어떤 사람들이 평하는 장면을 생략 또는 희석시키는 걸 택합니다. (그리고 John Ray는 1933년 법정에서 '율리시우스'가 음란물이 아님을 판정받았던 사례를 참조합니다.) 편집자는 어떤 이들이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음란성을 지닌다고 불만을 표하는 일부 장면들을, 비록 이야기에 핵심적으로 필요한 장면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입장에 놓입니다. 논쟁거리로 전락한 그 장면들은 오로지 도덕적 극치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한 비극 작품에 있어서 꼭 필요한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따라서, 결국 편집자는 이 작품의 출간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매우 냉혹한 말을 던지는 이들은 상업적으로 팔리는 포르노그라피 (또는 포르노) 역시 마찬가지로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할 지 모릅니다. 

많이 배운 자들은 아마도 보수적인 통계 방식을 따른 DR. Blanche Schwarzmann (언어 소통)의 연구 결과를 통해 험버트가 열정적으로 고백했던 일을 그저 시험관 속의 소란 정도로 치부함으로써 이 작품을 반박할 것입니다. 그 연구 결과가 말하기에, 적어도 12퍼센트의 미국 성인 남성들이 매년 어떤 경우를 통해서든 간에 험버트가 말하기를 그가 겪었던 특별한 경험과 그로 인한 엄청난 ‘좌절’을 느낀다고 합니다. 작품을 보면 운명적인 1947년 여름에 험버트가 겪었다는 그 엄청나고도 특별한 경험은 그저 험버트가 잘난 정신병리학자라도 만났었다면 없던 일처럼 되었으리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재앙과도 같은 경험이 그에게 존재할 수 없었다면 애초에 이 소설 또한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고 맙니다. 

 

 

 

 As a case history, Lolita will become no doubt a classic in psychiatric circles. As a work of art it transcends its expiatory aspects, and still more important to us than scientific significance and literary worth is the ethical impact the book should have on the serious reader. For, in this poignant personal study, there lurks a general lesson: the wayward child, the egotistic mother, the panting maniac. These are not only vivid characters in a unique story. They warn us of dangerous trends. They point out potent evils. Lolita should make all of us--parents, social workers, educators--apply ourselves with still greater vigilance and vision to the task of bringing up a better generation in a safer world.

 

 

 롤리타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의심의 여지 없이 고전의 위치에 놓여질 만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롤리타에는 아까 앞 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작품을 받아들이기 힘든 특징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작품으로서 롤리타는 그런 장애 요소를 훨씬 뛰어넘는 도덕적 지향을 담은 예술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어떠한 과학적 의의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또한 이 책을 매우 진지하게 읽을 줄 아는 독자라면 진정으로 이 책의 문학 및 윤리적 가치를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가슴 아픈 글을 쓰는 와중에 스쳐 지나가는 일반적인 교훈 하나를 지금 적어야겠습니다. 버릇 없고 제멋대로인 자녀, 그에 못지 않게 자기중심적인 모친, 그리고 헐떡거리는 미치광이. 이들은 어떤 이야기 속의 생생한 인물 정도가 아닙니다. 세 가지 인물은 심히 경계해야 마땅할 악의 징조를 우리에게 부각시켜 줍니다. 따라서 롤리타는 우리 모두-부모들, 사회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 교육자들-에게 항상 깨어 있어서 악을 경계하게 하고 동시에 더 안전한 세상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하게 기를 수 있도록 생생한 교훈을 전합니다. 




*롤리타의 소설 앞에 있는, 존레이의 서문 일부 발췌

*번역은 인터넷에 있던 것을 가져왔습니다.

 



*

 

 

롤리타의 서문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서문의 화자 존 레이는 이 책의 서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예찬하면서도, 소설에 나타나는 비도덕성은 결국 도덕성의 교훈을 위해 만들어진 장치이며 결국 소설은 윤리적 가치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소아성애가 얼마나 끔찍하고 더러운지 비판하기 위해 쓴 책' 이라는 오해다. 이건 완벽한 오해다.

나보코프는 짖궂게도 서문에 몇가지 장치를 숨겨놓았는데 이를테면 여기서 등장하는 의사의 이름 Blanche Schwarzmann은 앞은 프랑스어, 뒤는 독일어 단어인데 번역하면 '하얗고 검은 사람'이다. 그리고 첫 문단에 언급되는 Vivian Darkbloom 비비안 다크블룸은 Vladimir Nabokov 블라드미르 나보코브의 발음 장난이다. 서문의 화자로 설정된 의사 존 레이는 결국 나보코브가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나보코프는 결국 존 레이 같은 속물들의 모순적인 고상함을 가상인물을 만들어내어 꼬집고 있는 것이다. 나보코프에게 있어 '소아성애'는 자기가 표현하고자 한 것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실제로 아동 성범죄는 일어나고 있다. 이 지점에서 그는 비판받기도 한다) 문학작품을 윤리적 잣대로 재단하는 무지함이 그에게말로 통렬한 조롱의 대상인 것이다. 그는 오히려 문학 자체의 서사방식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한다. 그런데 이 서문을 글자 그대로 순수하게 해석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만약에 순수하게 해석했다면 나보코프에게 화를 내야한다. 소설에는 어떠한 통찰이나 반성이 하나도 없으니까! 

 

롤리타의 소설의 가치는, 문장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과, 새로운 조어의 아름다움, 결국 존레이는 누구인가에 대한 깨달음, 나보코프가 이들을 얼마나 통렬하게 조롱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웃긴지에 대한 유머, 이 모든 걸 스스로 느끼고 찾아내는 순수한 희열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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