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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지난 번에 본 베라 브리튼 청춘의 증언과 섞어 써보도록 하겠다. 청춘의 증언은 번역본이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 기반으로만 쓰여졌다. 책.. 책을 읽고 싶습니다.... 번역해 주세요... 출판사의 개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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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교육방송 인터넷 강사가 한 말이 도마에 올랐었다.'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이 있었고 이들 때문에 여성들은 참정권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래서 현대 여성들은 이 때의 여성들에게 모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라는 요였다. 말도 안된다. 권리는 천부적이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애초에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던 세계가 심각하게 비뚤어진 세계였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권리는 투쟁으로 쟁취하는 것인가? 여성들은 적어도 저런 말을 해선 안되는 것 아닌가?

 

   여성들은 기이하게도 모든 전쟁사에 교묘히 빠져있다. 모든 전쟁소설이나 전쟁영화를 봐도 여성의 자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설사 등장한다 해도 그들은 철저히 비련의 대상으로만 그려진다. 슬픔에 너무 잠식해서 꼼짝도 못하는 나약한 인간상. 그런데 이 인간상이야말로 제대로 그려진 적이 존재하긴 하던가? 남은 사람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던 고통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가? 그런 사람들만 있었던가? 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몸에 맞지 않는 군복을 입고 어머니의 반대를 무릎쓰고 머리를 짧게 깎고 키만한 총을 들고 남자들과 똑같이 살았던 스무살도 채 되지 않았던 소녀병들의 이야기는 어디로 다 사라졌는가? 전쟁을 지탱해주던 간호사, 요리사, 빨래병, 수선사, 공작원, 연락병들 이야기는 누가 해야만 하는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겐 조국이 없다고 했다. 그럼, 이 스러져간 여성들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들은 대체 뭘 위해 그랬던 건데?

 

 

 

 

 

 

 

 

 

 

 

   베라 브리튼의 청춘의 증언은 그녀가 직접 겪고 경험했던 모든 일을 기반으로 쓰여졌다. 그건 자서전이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자 했지만 결국 자신응 온전하게 내비치는 자서전의 형식을 취했다. 중상류층에서 태어난 그녀는 예쁜 옷도 입을 수 있었고 공부도 할 수 있었던 신여성이었다. 아주 자유로운 시대상은 아니라 자유연애 정도는 가능했지만 보호자가 동행해야 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으며 그와 함께 옥스포드로 가서 공부할 날만을 꿈꿨다. 그녀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1차 대전이 일어났다. 그녀의 연인이 전쟁에 자원했다. 충분한 교육을 받았던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 애국심 고취에 힘입어 너도 나도 전쟁에 뛰어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연인. 그녀의 친구, 사랑스러운 그녀의 남동생까지 모두 전쟁의 구렁텅이 속으로 말려들어가 버린다. 똑똑하고,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 잘 알았으며, 서프라젯 활동에도 관심이 있었던 그녀는 당신도 자연히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안하고 손놓고 있을 수 없다고 목놓아 외친다. 그녀에게 돌아왔던 질문들은 이런 것 뿐이었다. "니 주제 좀 알아"

 

   알렉시예비치는 이번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여성작가다. 그녀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품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는 완벽하게 문학이라고 할 순 없다. 그녀는 직접 발로 취재하며, 러시아 전체의 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을 찾아다녔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책에 문자로 옮겼다. 책을 읽다보면 그들의 언어가 너무 적나라하게 녹아 들어가 있어 외면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건 문학이라기보단 너무 생생해서 끔찍한 현장르포다. 읽다보면, 지금은 할머니가 된 참전 여성도 울고 있고 알렉시예비치도 울고 있고 나도 얼굴을 번들거리도록 적시게 된다. 그러면 그 시절의 소녀병사는 울지 말라고 우리를 위로한다. 알렉시예비치가 취재를 다닐 때마다 가장 많이 마주했던 질문은 이런 것이라 한다. "남자들의 이야기를 쓰면 되지, 왜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나요?"

정답 : 지금까지 이야기해줬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세상에, 이렇게 가냘프고 고운 아가씨가 전투에 나갔다니!"

 

 

전쟁에서 그들은 여자의 얼굴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들이 여성인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스스로 남성이 되어야 했다. 인간이 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얼굴이 흉측한 채로 죽고 싶지가 않아서 몸을 피하기보단, 얼굴을 먼저 피하고 밤마다 어린 소녀 병사들 머리를 솔방울로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주었던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그들도 너무나 당연하게 인간이었으며 여자였음을 다시 퍼뜩 깨닫게 되며 그 최소한의 욕심이 너무 안타까워서 가슴이 저미는 것이다.

 

 

 

 

소녀 병사들! 모스크바가 바로 옆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미용사를 불러주겠다. 눈썹이랑 속눈썹도 물들이고 머리를 말아도 된다. 규정상 안되는 일이지만 나는 여러분이 예뻤으면 좋겠다. 전쟁은 길다.. 금방 끝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정말 어떤 여자 미용사를 데려오신 거야. 우리는 머리를 말고 염색도 했어. 아, 정말 얼마나 행복하던지...

지나이다 프로코피예브나 고마레바, 무선병

 

 

 

나도 베라 브리튼처럼, 알렉시예비치처럼 이 얘기를 끊임없이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의 전쟁사는 언제나 금기시 되었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검열이 맞다. 여자가 전쟁이야기를 하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경험해 보지도 않은 주제에- 라는 내용이 반드시 나오게 되고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가 않아서 입을 딱 다물어 버리는 것이다. (아니면 우리 여성들이 이렇게 살게 된 건 그 분들의 희생이 있어서야, 같은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해버리지) 계속해서 얘기해야 한다. 전쟁에 참여한 여성들이 있었어요. 모든 것을 버리고 무엇을 위해서 뛰쳐나왔는지도 모르지만 그 무참한 전쟁에서 묵묵히 죽어간 여자들이 많았어요. 당신은 그들에 대해서 아나요? 그들에 대해서도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전쟁영화를 봐도 사실이 아니고 책을 읽어도 사실이 아닌거야. 그러니까, 그게 달라... 뭔가가 달라. 그렇다고 전쟁을 직접 겪은 내가 이야기하면 정확하냐. 그것도 아니거든. 전쟁은 그렇게 끔찍하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어. 때론 전쟁터에서 맞는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전투가 있는 날 아침이면... 주위를 보며 생각했지. '어쩌면 아침을 맞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몰라. 아,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공기도.. 햇살도..'

올가 니키티치나 자벨리나, 군의관 외과의

 

 

 

이제야 모든 걸 말할 수 있게 됐어. 묻고 싶어... 전쟁 나고 몇 달 사이에 수백만의 병사와 장교들이 포로로 붙잡힌 게 누구 때문이지? 알고 싶어... 전쟁 전에 우리 붉은 군대의 훌륭한 지휘관들을 독일 첩자니 일본 첩자니 몰아세우고 총살시켜서 다 죽여버린 게 누구지? 정말 알고 싶다니까... 히틀러가 탱크와 전투기를 만들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그 때, 부됸니 기병대만 믿고 두 손 놓고 있던 게 누구냐고? 누가 '우리 국경은 철통같이 튼튼하다...' 이따위의 말로 우리를 안심 시켰느냔 말이야? 전쟁 나자마자 우리 군대가 탄환 남은 거나 걱정하는 신세가 된 게 누구 책임이냐고..

묻고 싶어.. 이제는 물을 수 있어... 내 인생은 어디 있지? 우리 인생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살아. 남편도 침묵하고. 지금도 우린 무섭거든. 두려워...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그게 나는 부끄럽고 서러워...

발렌티나 예브도키모브나 엠-바, 빨치산 연락병

 

 

 

 

   전쟁이 끝난 뒤 돌아온 베라는 목놓아 외친다. 보복전 반대, 전쟁 반대, 평화 수호. 우리의 희생만큼 그들의 희생도 엄청났으며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그녀의 외침은 알렉시예비치가 만났던 그 시절 소녀병사들의 애원과 너무도 똑같아서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다.

 

   청춘의 증언 영화를 본 뒤 가장 가슴이 오랫동안 아리는 것은 베라의 남동생 역할을 맡았던 에드워드다. 눈을 감고 영화에 대해 떠올리고자 하면 가장 먼저 그가 여기저기 서성거린다. (킹스맨에서 귀여운 에그시 역할을 맡았던!) 자서전에서 그러했기 때문에 베라의 남동생 에드워드는 매우 생생하게 그려진다. 누나를 사랑하고 숭배하며 용맹하고 정말 사랑스러웠던 어린 남동생. 자신의 이야기를 어느정도 쳐내면서까지 그를 그렇게 묘사하는 것은 베라는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기를 바랐던 거다. 그리고 그게 베라가 자기 자신의 아픔을 표출해내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사실 정말 힘들어서 외면해 버리고 싶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사실 이제 와서야 이런 책을 읽고 좀 아는 척 하려는 것은 일부러 감정 소모의 늪에 빠져 현실을 잊어보려는 도피성도 아예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빡빡한 지금을 잊으려고 엄청 슬픈 소설을 읽는 것처럼. 사실 그렇게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렉시예비치의 책을 읽었으면, 청춘의 증언을 꼭 보았으면 좋겠다. 기록과 기억의 힘은 엄청나서 내 마음에 죄책감이 한획 더 새겨지는 것 또한, 비겁한 방식이지만 또 하나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방식일 거라고 여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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