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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예술가의 특별한 인생을 마치 심포니를 연주하듯이 적나라하게 시위한 예술가들로 우리는 뒤샹과 보이즈 그리고 앤디 워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세 사람 모두 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신화로 보일만한 인생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작품보다는 사상이 두드러졌으며 그들의 회고전이 별로 열리지 않는 것도 작품보다 사상이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1964년 11월 11일 보이즈는 서독 TV에 출연하여 <마르셀 뒤샹의 침묵은 과대평가되었다 The Silence of Marcel Duchamp is Overrated>라는 제목으로 말했다.
훗날 왜 뒤샹의 침묵이 과대평가되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르셀 뒤샹의 반예술 태도와 최근의 태도 두 가지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뒤샹은 플럭서스 예술가들을 비판하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고, 자신이 모든 걸 이미 창조했다고 호언했어요.
그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해가 다를 수 있어요.
내가 한 말은 각기 다른 충동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물론 수수께끼 같은 말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나의 아이디어는 뒤샹의 반예술 개념을 거부한 데 있었습니다.
반예술 개념에 관한 나의 견해를 대신 피력했는데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려는 방법론적 의도였습니다.
그것은 예술 전체에 광범위하게 걸친 새로운 요소가 플럭서스 예술가들에게 있다는 점을 홍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지요.
반예술 안에 있는 ‘반 Anti'이란 말은 예술의 풍부한 개념과 극도로 한정된 고립 속에 있는 은신처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수학과 반수학, 물리학과 반물리학 같은 쌍을 짓는 말에서처럼 단지 같은 분야의 제한된 부분을 표현한 것으로 무의미한 말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폭넓은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극단 모두를 필요로 합니다.”


뒤샹이 준 영향에 관해 묻자 말했다.


“뒤샹을 존경하지만 그의 침묵은 배척합니다.
그는 쉽게 끝나고 말았어요.
아이디어가 고갈된 것이지요.
중요한 어떤 것도 그는 제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를 매우 존경하지만 침묵에 관해서는 아니며, 그의 침묵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침묵 외에 뒤샹에 관해 비판할 만한 것이 있느냐고 묻자 말했다.


“그의 침묵이 지나치게 높게 평가된 것 외에도 그의 작품에는 성나게 만드는 형태가 있고, 의도적인 보헤미안 습성과 부르주아 경향의 요소가 있는 것을 지적할 수 있어요.
뒤샹은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려고 했으며 이런 의도 때문에 창조적 힘을 감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나의 견해로는 마르셀 뒤샹의 침묵은 대단한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것을 이미 한 것이라네.
우리가 이미 모든 걸 했다니까.
행위, 해프닝, ... 그것들은 낡은 것이야’라고 말했어요.
어째서 우리 모두가 마르셀 뒤샹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지요?
왜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쉴러, 혹은 니체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지요?”


뒤샹의 관점이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답했다.


“뒤샹의 침묵은 잠재의식을 활기 없도록 남겨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관점으로 초현실주의와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잠재의식으로 살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실재 그 위에 있다고 믿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실재 아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진흙투성이 물에서도 낚시를 할 수 있으며, 많은 이미지를 낚아챌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들은 억압된 것들의 분출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방법론으로 말하면 뒤샹은 의식에도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지한 분석과 연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가 반대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작업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한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그저 억압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뒤샹의 침묵은 ‘언어의 절대적 부재 absolute absence of language’란 개념으로 대치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침묵하기 전 뒤샹은 어떠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답했다.


“침묵하기 전 뒤샹에게는 언어가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침묵하기보다 토론을 했어야 마땅했는데 침묵이 공헌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떤 것도 해결하지도, 성취하지도 못하고 말았어요.
특히 젊은이들과 더불어 토론했어야 마땅했는데 만약 그렇게만 했다면 그의 작품들은 생산적이었을 테고, 그의 개념들은 오늘날 유용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미학적으로 뒤샹의 위상은 없습니다.
그가 참여를 거부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언어가 부재했기 때문이지요.
어째서 할 말이 없다는 겁니까? 언어가 없기 때문에?
이야기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당신의 신랄한 비판을 뒤샹 본인이 알고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말했다.


“몇 사람이 와서 내게 말하기를 뒤샹이 ‘독일에서 어떤 자가 나의 침묵에 관해서 말하기를 과대평가라고 하던데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고 물었다더군요.
난 뒤샹이 내 말 뜻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만약 분명한 뜻을 알지 못한다면 내게 편지를 보내 내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물었어야 하지 않았겠어요?
왜 안 그렇습니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뒤샹은 미술품이란 부르주아 구매자의 손에 넘어가기 전 창조과정에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라고 하자 그는 말했다.


“왜 그렇습니까?
렘브란트의 그림을 예로 들어 봅시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미술관 벽에 걸리던, 부르주아의 집 벽에 걸리던 무엇이 다르단 말이지요?
그림을 지하실에 넣어두었다 손치더라도 그것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일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림의 절대적인 기능은 보존되는 것 아닙니까?
그림이 꼭 벽에 걸려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왜 그림이 미술관 벽에 걸려있는 것보다 부르주아 집 벽에 걸려있을 때 덜 아름답다고 말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어째서 그림 자체의 성질이나, 가치가 감소된다는 겁니까?
성질과 가치는 당연히 부식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좀벌레가 부식시킬 때까지 그림은 남아있는 것이고, 혹 부식되었다 손치더라도 그것에 관한 사진이나 문서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 아닙니까?”


뒤샹에 관해서는 그만 이야기합시다.


“그러는 편이 그에게 이익이 되는 일일 겁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misulmun49/ 광우의 문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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