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빈티지전은 올해 가 보았던 수많은 전시들 중 가장 흥미로웠던 전시였다. 일단 소파와 오래된 골동품 같은 텔레비전들이 가득했던 전시장이 그러했고, 어두침침한 조명 속에서 포근한 소파에 앉아 한참동안 흑백화면을 응시하다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게 되는 특이한 동선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다른 블록버스터 전시나 타 갤러리에서 한 수많은 전시들과 이 전시가 다른 점은 전시의 의도가 굉장히 확고했다는 것이었다. 비디오라는 매체를 처음으로 시도한, 바로 그 당시의 생생한 초창기의 비디오 아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았다는 점에서 마치 그 당시의 시간이 새롭게 재현됐다는 점에서 그랬다. 아마도 전시를 하는 데에 그러한 빈티지틱하고 소박하고 따스한 거실 같은 포맷을 선택한 것은 더 이상 벽난로가 있는 거실이 아니라 소파..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잘 몰랐다. 그것이 여성의 한정된 예술 장르라고 생각해서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주체는 여성이다, 여성의 인권을 되찾자’ 라는 개념이 아니니(그건 이미 구시대적 발상이 되었다, 애초에 ‘여성적’이고 ‘남성적’이다 라는 개념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 현대에서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그걸 넘어서는 무언가일 터인데, 상대적이고 개인의 이념적인 내용을 예술화 시키는 건 작가나 관객들에게나 굉장히 당황스런 전개인지라 21세기의 페미니즘 예술을 감히 한 단어로 정의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전시를 보며 다시 생각해 본 점은 페미니즘 예술은 주체가 여성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예술의 흐름에 저항하는 새로운 이념을 제시했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
시청~광화문 쭉 돌다가 생각나서 다녀왔다. 처음 만나는 작가는 아니다. 전에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한중일 팝아트 전을 했을 때 일본의 팝아트로 무라카미 작품들이 많이 왔었다. 어느정도 예상하고 갔긴 하지만 확실히 명불허전이었다. 팜플렛이든 전시 설명이든 무라카미의 평은 '오타쿠적 하위문화' 를 예술의 세계로 끌어올린. 뭐 그런 식으로 해석하곤 하는데. 음 난 솔직히 잘 모르겠다. 말만 그럴싸하지 와닿는 게 없다. 애초에 언론에 얼마나 노출되느냐로 '상위문화'와 '하위문화'를 나눈 것이 그렇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들의 문화를 대중문화보다 하위로 보는 개념에서 편협한 시각만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사실 무라카미는 그런 소수자 장르 사람들에게 욕 엄청 먹는다. 그 세계에 잘 알지도 ..
좋은 글 생각날 때마다 봐야지. 황지우 전 한예종 총장의 신입생 환영사 내가 시에 처음 ‘눈 떴던’ 때라고 할까요, 파블로 네루다식으로 표현해서 “시가 나를 찾아왔을 때”가 중3 때였던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방학 때 시골 친구집 가서 곁눈으로 힐끗 보았던 친구 누나가 무지무지 보고 싶어지고, 사타구니에서 이상한 털이 나기 시작하면서 생의 비린내를 느꼈다고 할까요, 어느 날 갑자기 산다는게 시시하게 느껴지고, 가을날의 신작로 앞에서 어디론가 멀리 훌쩍 떠나버리고 싶던 이른바 사춘기 징후 속에서 문학이라는 열병에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 김소월의 ‘초혼’이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독’이라는 시를 접하고는 그만 내 가슴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자주 가슴이 무너져내렸는..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예술가의 특별한 인생을 마치 심포니를 연주하듯이 적나라하게 시위한 예술가들로 우리는 뒤샹과 보이즈 그리고 앤디 워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세 사람 모두 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신화로 보일만한 인생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작품보다는 사상이 두드러졌으며 그들의 회고전이 별로 열리지 않는 것도 작품보다 사상이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1964년 11월 11일 보이즈는 서독 TV에 출연하여 라는 제목으로 말했다. 훗날 왜 뒤샹의 침묵이 과대평가되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르셀 뒤샹의 반예술 태도와 최근의 태도 두 가지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뒤샹은 플럭서스 예술가들을 비판하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고, 자신이 모든 걸 이미 창조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정사각형이 계속해서 교차하는 영상을 보며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세상에서 매우 미미한 존재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나라는 미미한 존재는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 작은 원자들의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감상이지만 세상은 정말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대한 시각적 깨달음은 나에게 꽤 충격이었다. 끊임없이 확장되고 축소되는 영상들은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에 대해 보여준다. 세계의 구축은 결국 미미하고 사소한 것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어떤 수업시간에 읽었던 이민규의 카스테라 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주인공의 냉장고가 망가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참된 냉장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는 냉장고를 다른 용도로 쓰기로 하고 그곳에 사람에 유용한..
아트선재에서 본 사이먼 후지와라라는 작가는 어렸을 때 한 추상화를 보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흔들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감성과 경험으로는 추상적 표현을 끝까지 이끌어내는 그런 것을 할 수 없기에 추상화가가 아닌 다른 방법을 택했다고 했다.(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어쨌든 같은 맥락ㅇㅇ 그가 말하려고 하는 건 이게 요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게 요점.) 그의 작품은 흥미로웠지만 이 대목에 대해서는 꽤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추상화가가 되서 추상화를 그릴만한 감성이 따로 존재하는 건지. 나는 지금껏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기성작가가 그렇게 단정지어 말하는 것을 보고 쫌 충격을 먹었다. 그런 것이 아닐까? 도 아니고 그렇다ㅇㅇ 이런 어투였음. 그러고 다시 생각을 해 봤는데 ..
공포에 대처하는 예술이라고 했다가, 딱히 '대처'(해결?) 이라기 보단 반응이나 반사 정도가 괜찮을 거 같아서 제목 바꿈.나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공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또다른 산업이나 예술을 창조한다. Kraftwerk 의 원전 반대 콘서트 폭죽을 이용한 작업을 하는 중국의 Calguo Qiang 라는 작가. Cyprien Gaillard라는 작가의 The Lake Archives깊이에 대한 막연한 공포.건축이나 도시에 대한 작업들을 주로 하는 거 같은데, 이 작업도 참...ㅋ.....웃기다할지 뭐라해야할지.이 작업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구매했다는 거 같은데. 어쨋든 지금 신소장 전에서 상영하고 있다.이 작가도 신기한 작업 많이해서 계속 찾아 보고 있음.그리고 잘생김